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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철학에 몸담으려 하는가?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4. 10. 23. 02:05
"아 그리고, 이번 학기에 철학을 부전공하기로 했어요." 서로 근황을 전하는 자리에서 나는 자랑스럽다는 듯 내 결정을 전했다.
"오, 그래?" 나란히 걸어가던 선배가 물었다. "왜 철학을 골랐어?"
그 질문에 나는 속으로 꽤나 당황했다. 같은 문장이라도 그녀의 질문은 우리 엄마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왜'는 찌푸린 인상에 거슬린 듯한 언성을 같이했고, 설득하고 저항해야 마땅할 질타에 가까웠지만 선배의 '왜'는 조금 더 물음표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이 쪽이 더 당연한 수순이긴 한데, 철학을 하면 굶어죽는다는 인식 때문인지 이렇게 궁금증을 담아 질문한 사람이 없었고, 설명해도 모를 것 같다는 내 선민의식 때문인지 그것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내 스스로도 입 밖으로 누군가를 향해 설명해본 적도 없었다. 정말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 같은, 그리고 내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선배의 깊숙한 질문에 내가 신음같이 내뱉은 대답은 고작 '아직 잘 몰라서' 였다.
"아직 잘 몰라서요. 더 공부해보고 싶어졌어요."
대답한 순간부터 너무나 부끄러웠다. 철학을 논하는 사람치곤 너무나 시의적절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건 그 많은 분야 중 철학을 골랐냐는 질문에 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왜 하필 철학을 공부해보고 싶었냐구. 왜 그것을 부전공까지 선언할 정도로 만들었냐구. 더 공부해보고 싶은 것과 부전공 선언은 어떤 관계가 있는거냐구. 이런 모든 질문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대답이었다.
선배의 가볍다면 가벼울 질문과 나의 시원찮은 대답은 이번 학기 철학 수업때마다 매번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그러게, 나는 왜 철학을 하고 싶어할까?철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과학처럼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는 것인가? 철학은 생각보다 그 관심의 대상이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의 거대한 질문들을 주제로 삼는 형이상학도 철학이라고 불리지만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학도 철학으로 불린다. 정의란 무엇인지 논하는 가치론, 윤리론 등도 철학으로 편입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컴퓨터는 생각하는가' 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인식론과 심리철학도 철학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보다보면 철학은 그 관심대상으로써 정의되기보다는 골똘히 생각하는 그 자세에 그 본질이 있는 듯 하다.
철학은 한자로 '밝을 철' 자를 쓴다. 밝게 생각하는 학문이란 뜻인데, 여기서 밝게 생각함이란 명철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명철함도 '밝을 명'에 '밝을 철'를 쓰긴 한다..). 우리가 밝은 곳에서 사물을 보다 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철학은 대상에 대해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뜯어보는 종류의 학문을 말한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종류의 학문활동은 모두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밝은 생각이라는 것은 여러 논거들이 반박의 반박을 오갈 때 볼 수 있다.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하고, 그 논리를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놓치고 있는 차이점이나 이면을 찾아내 보여주는 철학적 사고능력은 밝은 빛이 있어야 두 색깔이 다름을 구분할 수 있는 것과 닮아 있다. 광학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에 분해능이 더 좋은 렌즈를 사용하는 것이다.지금 나는 앞의 두 문단에서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뜯어보았다. 내가 받아들이는 철학은 이런 활동이다.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특징을 관찰하고 논리적인 설명이나 교훈을 덧붙이는 행위들을 한다. 나는 그런 것이 즐겁기 때문에 철학을 좋아한다. 관심이 닿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어하고, 호기심을 가지며,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보는 순간들이 즐겁다.
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식 그 자체가 지혜로운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지식들을 배우고 연결하며 하나의 사고양식을 익히는 과정에서 지혜가 터득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현상을 보아도 수학적 사고법을 장착한 사람은 무엇이 같은지 다른지에 집중하고, 과학적 사고법을 장착한 사람은 증명된 사실인지에 집중하고, 미학의 사고법을 장착한 사람은 직관적 감흥을 찾는다. 이렇듯 특정 분야 지식을 배우면서 같이 습득한 사고법은 세상을 바라보는 언어와 재료, 때로는 편견이 되어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통행로가 된다.
철학적 사고양식은 대상을 다방면에서 더욱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이런 철학적 사고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길 잘하고, 그들의 논지를 잘 캐치해내며, 그들이 놓치고 있는 참신한 생각들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또, 철학을 하다보면 두 가지 이상의 입장의 논리가 둘다 맞게 들리는 광경도 보게 되므로, 그만큼 여러가지 의견에 대한 포용력과 아량 또한 넓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계의 지식을 얻고 싶었다. 나의 관심이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이러한 사고 자체로 이동하자 나의 질문들은 역사 속 언젠가 한번 던져졌던 것이었음을 깨달았고, 그런 분야들을 하나 둘 알아가니 그런 새로운 질문들이 덩달아 나에게도 자연스레 더욱 빈번히 들었다. 그런 질문들이 계속 떠오를 때 이성적으로는 괴롭지만 심적으로는 풍요롭다.
어릴적부터 지식에 대한 소유욕은 대단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꿈이 '세상의 지식 모두 배우기'였으면 말 다했지. 비록 지식은 내가 정복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그에 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이해력은 터무니 없이 짧다는 것을 중학생이나 되어서야 깨달았지만, 머릿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싶어하는 천성적인 기질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시작되는 많은 질문들은 물리를 비롯한 여러 분야를 거쳐 최근에는 나 자신, 그리고 지금은 인류가 지금토록 가졌던 의문들로 넘어왔다. 세상의 많은 질문들을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 초교시절 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꺼지지 않은 게 아닐까. 질문들은 곧 지식으로 나를 이끌거야, 하는 바람에서.
철학을 하려는 것에 궁극적인 목표랄 것은 없다. 뭔가를 알고 싶다거나 능통해지고 싶다기보단, 이런 생각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고 싶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욕구인 것 같다. 생각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재밌는 것이니깐.
그럼 좋아하면 됐지, 왜 부전공까지 선언했는가? 그것은 단지 학위에 대한 알수 없는 소유욕 때문일 것이다. 그 소유욕은 '나 철학 (부)전공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에서 온 것 같다. 학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4년간 그 분야의 사고법대로 생각하길 훈련받고 관련한 지식을 조각조각이나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를 철학하는 사람으로 소개할 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반가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혹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다.
그렇다, 부전공의 선언은 새로지은 이름과 같다.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라기보단 타인들을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 나를 규정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타인이 나를 그렇게 바라봐줬으면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름은 그 자체에 의미는 없는 지칭어에 불과하다. 부전공도 나에게 그런 것이 될 것이다. 나를 규정짓지만, 그 자체로의 의미는 없는.나는 이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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