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주님은 말이 없다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4. 10. 13. 03:32

    창조자의 당위와 책임에 대하여

     

    급하게 젖힌 차문을 조심히 닫을 새도 없이 나는 눈앞에 보이는 단칸 공중화장실로 뛰어갔다. 백 걸음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법한 강한 악취가 나는 화장실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근심은 일단 풀고 봐야겠었다. 냄새는 참을 수라도 있지, 매정하게 가벼이 헛도는 휴지심은 나를 곤란하다 못해 난처하게 만들었다.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치미는 것은 둘째치고 한덩이 놓일 자리에 감사해야지, 하며 인내하던 나는 문득 나에게 당연하듯 주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뭐, 그런다고 없던 휴지가 생길리 없으니 문자를 한 통 남겨두고. 

     

    간간히 공용 쓰레기통에 대해 곱씹어 읽었다. 쓰레기통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일본에서의 불편함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이 복작한 도시에 왜 쓰레기통 하나 없는지 불편해했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대가 없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혜자라는 것을 깨달았고, 더이상 필요 없는 물건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 차이를 자연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쓰레기통은 자연적-스스로 그러한- 물건이 아니며 다분히 편리의 목적성을 지니는 사회적 장치이다. 기획자가 그곳에 두길 결정한 후 소정의 목적을 이루도록 관리자는 책임 다 해 유지한다. 하나의 장치 이면에는 여러 직책명으로 엮인 사람들이 있어 장치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물체와의 관계는 그 직책명들로 분해 분담될 수 있고, 그에 걸맞는 물체에 대한 책임과 권리 또한 생성되고 나눠가질 수 있다. 

     

    자연물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기가 막히게 붙인 이름 뜻대로, 누군가 거기에 있길 바라서 혹은 누군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길 바라서 있는 것이 아니다. 행여 라플라스의 악마 수준의 여호와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하고 있지 않다- 아니,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그 존재조차 거부하고 있다. 우리가 창조자의 권위를 배격하는 것은 우리가 그 존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를 배격해야만 우리가 관리자로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존재자를 우리가 밀어내야 물체에 대한 권리를 한 자리 꿰어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고 있다. 주님은 말이 없지만 대신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원리들로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우월한 권좌를 지키고 있다. 뒤집어보자면 우리가 창조자의 격을 넘보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그리하도록 설계된' 규칙을 부수고 행동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리하도록 설계된' 우리가 무슨 수로 감옥을 탈출하듯 벗어날 수 있는가. 그 원리들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어 감옥과 탈옥수가 물리적으로 구분되듯 이격시킬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들은 모두 '그리하도록 설계된' 대로 동작하고 있으며 그런 모든 행위들은 스스로 그렇지 않게 될 수 없다. 

     

    선악과는 왜 따먹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을까. 하와는 따먹을 자유 또한 설계된 것임은 인지하지 못했다. 선악과 자체는 장치일 뿐 그 의미는 '먹지 말라'는 규칙에 있었고, 규칙의 목적은 선과 악을 정의하기 위함에 있었다. 하와는 창조의 능력이 없음에도 자신의 선택을 통해 세계에 선과 악이라는 규칙을 추가했다. 참으로 탁월한 설계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밖에 걸어갈 수 없게 설계된 도살장 유도 통로 위에 선 우리는 무능력하다. 

     

    모든 도전이 좌절되는 빈틈없는 규칙은 곧 구성원들의 사고회로를 성형한다.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은 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설계된 세계는 곧 구성원들을 길들일 힘 또한 가진다. 창조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구성원들이 창조자에게 덤빌 수 없게 '구성원들 또한' 설계할 수 있다. 즉 창조자의 권좌는 빈틈없는 설계를 통해 완성된다. 창조와 설계는 구성원들의 존재성을 앞서기 때문에, 구성원은 창조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전쟁은 없을 수 없다. 자가당착적이게도 우리가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보다 앞설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의 불가침영역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뜻을 제약 없이 펼칠 수 없다. 평화는 오직 절대자의 존재로만, 절대자의 영향권 내에서만 완벽히 이룩할 수 있다.

     

    나는 소프트웨어 공학을 섭렵하며 소프트웨어 세계 속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누군가는 그 속에 원리를 구상해 짜넣고 그런 장치들을 통해 목적들을 이루고 있다. 배달의 민족의 개발자는 체계화된 배달 체인을 사회에 도입시켰고 토스는 간편한 금전거래를 가능케 했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은 그 방법이 이룩할 수 있는 권좌의 크기에 비해 제약없이 습득할 수 있는데 반해 창조된 세계 속 존재 또한 느슨히 창조자를 뛰어넘을 수 있다. 보안과 해킹의 군비경쟁은 창조자가 뛰어나게 제압하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 

     

    창조자는 탈옥을 꾀하는 자들에게 불가능을 맛보여 주어야 한다. 트루먼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세트장 창조자의 뜻과는 다르게 세상의 끝이 (어쩔 수 없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든 세계에 트루먼이 없으려면 세계 안에서 불가능한 영역을 감지하게 하고 그것이 도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납득되게 강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멋모르고 빛의 속도에 덤비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비현실보다 한단계 불능한, 빈틈없는 불가능이어야만 한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