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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이란 무엇인가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4. 5. 8. 02:26

    나의 반려식물 토리는 살아있다. 
    그렇다면 다산관 프로젝트는 토리와 동일한 방법으로 '살아있'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개념을 정의해보자. 

    Photo by Alex Wing on Unsplash

    생명에 대해 정의하기 이전, 정의한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정의를 하는 행위는 (목적 측면) 현재 지칭하는 대상을 우리들 사이에서 오류없이 공유하기 위함이며, (의미 측면) 대상을 그렇지 않은 것과 차별될 수 있는 개념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실천적 측면) 우리가 지칭하는 대상(들)이 지닌 특징이나 지니지 않은 특징, 지켜야하는 조건 등을 나열해 우리는 대상을 정의했다고 말한다. (판정 측면) 우리가 정의함을 성공했을 때 '적확히 정의되었다'고 말하며, 이는 정의하는 목적을 지키고 의미를 성취했을 때를 일컫는다. 
     
    우리가 어떠한 행위를 '수행했다'고 말할 때에는 언제일까. 그 행위가 가지는 목적과 의미를 정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을 모색해 실행했으며, 그 방법이 목적과 의미를 성취하였는지 재확인하면 완수된다. 판정의 과정은 검토의 과정인 동시에 실행한 방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므로 생략할 수 없다.
     
    정의하는 행위는 의미 단위를 창조하는 행위이므로, 실천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지닐 조건과 지켜야할 조건을 기준으로 모든 대상을 정의에 부합한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부합함을 판별하는 것은 곧 부합함을 존재론적으로 확인하거나, 부합하지 않음이 불가능함을 증명함으로써 완수된다. 


     
    생명을 정의해보자. 생명을 지닌 존재들 중 분명한 것들을 나열해보자. 동식물이 가장 대표적이다. 우리는 생명을 지닌 존재들을 생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생물들 중 동식물들을 실생활에서 흔히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동식물들을 보고 생명의 특징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순환적으로 유추한다. 다시말해 동식물은 모든 생각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을 다 가져야 하고, 동식물이 일반적으로 가진 공통점은 곳 생명의 특징이다.  
     
    이번엔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판별할 조건들을 나열해보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생명이란 개념을 '생물학의 관심대상'으로서 순환적 정의를 하려 하는 것이 아님이라는 점이다. 나는 생물학자들이 관심갖는 생명을 정의하고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생명을 가졌다고 부르는 것들을 나열함으로써 내가 가진 '생명'이란 개념은 다음과 같다. 
     
    생명의 특징
    0) 생명은 성질이다.
    1) 생명을 지닐 수 있는 대상은 행위이다. 행위는 생명을 배타적으로 지니거나 지니지 않는다. 지니는 동시에 지니지 않을 수 없다.
    2) 생명은 시간적으로 지닐 수 있는 성질이다. 
     
    생명의 조건
    3) 생명을 가진 행위는 생명의 성질을 지닌 시간을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선호한다. 
    4) 생명을 가진 행위는 또 다른 그러한 행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생명의 판정
    5) 특정 행동이 위 2-4의 조건을 모두 지켜야,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대상이 생명을 지닌다고 판정한다.
     
    따름정리 2.1
    생명에는 시간적인 시작과 끝(탄생과 죽음)의 순간이 존재하고 그 사이 시간동안 해당 행위가 생명을 지닌다고 말한다. 
     
    따름정리 2.2
    생명이 비로소 그 끝을 영원히 미룰 수 있게 된다면 생명의 성질을 잃는다. 즉 시간과 독립적으로 지속되는 행동은 생명이 아니다.
     
    따름정리 3.1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단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선 속에서 생명의 시작은 당길 수 없으니 대신 생명의 끝을 최대한 미루려고 노력한다.
     
    따름정리 3.2
    생명을 가진 것은 스스로 '생명을 가짐'을 끊임없이 유지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따름정리 2.2에 따라 생명을 지닌 이상 그 끝은 언젠가 도래한다. 

    Photo by Nathan Dumlao on Unsplash

    나는 사람이 생명의 행동을 수행한다고 정의한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존재에 부여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위에 부여된다. 즉, 우리는 생명의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생물학적 생존은 우리의 존재를 있게하는 행위이므로 필수적으로 하고 있는 생명의 행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생존 말고도 여러 생명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프로젝트가 생명을 지녔다고 정의한다. 
    나는 기업이 생명을 지녔다고 정의한다. 
     
    나는 배터리가 없으면 충전하러 돌아가는 로봇청소기의 행동을 생명을 지녔다고 정의한다.
    나는 죽고 싶어하는 자는 생명을 지니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람의 특성 또한 잃는다고 정의한다. 즉, 죽고 싶어하는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어도 생명을 잃은 상태이다. 
    나는 우리 인류의 살아감은 그 과정에서 영생을 쟁취하는 순간 생명을 지니지 않은 행위가 된다고 정의한다. 이 명제는 우리가 영생을 쟁취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생을 쟁취하는 순간 우리는 그 전의 생명을 지닌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나는 생명을 가질 때에만 존재하며, 나는 죽음 이후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흔적들은 내가 존재했음을 증명하지만, 그 자체가 행위가 아니므로 나의 흔적들은 내가 아니다. 나의 흔적들 중 생명의 행위에 해당되는 것들이 있더라도 그 또한 나의 생명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므로 내가 아니다. 

    Photo by Ed Leszczynskl on Unsplash

    나의 도토리나무 도리는 그 생명의 행동이 물리적 존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활동을 해야만 살아있다. 
     
    다산관 프로젝트 또한 그 생명의 행동이 물리적 존재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속의 부원들. 부원이 더이상 없으면 다산관 프로젝트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다산관 프로젝트가 살아있다고 말하려면 부원이 줄어드는 일을 피하려 노력해야한다.
     
    하지만 다산관 프로젝트는 부활했다. 즉, 죽은 상태에도 새로운 시작을 기약할 수 있다. 이는 다산관 프로젝트가 물리적 존재에도 종속되어 있지만, 개념적 존재로서도 자립하기 때문이다. 즉, '다산관 프로젝트' 라는 정신, 활동양식 등이 기록되어 이어진다면 후대의 물리적 존재가 스스로를 그 정신에 종속시켜 (즉, 동아리를 재개해) 부활할 수 있다.
     
    그 정신과 활동양식의 기록물들은 나무의 씨앗과 같다. 나무 하나는 삶과 죽음이 있지만, 나무 종 하나를 보자면 개체들을 거쳐 영속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즉, 나무 종은 생명의 행위를 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나무 한 그루는 생명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는 개념적인 존재를 기록함으로써 그 개념을 생명의 한계로부터 탈피시킬 수 있다. 물리적으로 종속할 존재가 새로이 나타날 때 다시 꽃필 수 있도록. 그 기록물들은 대상 개념이 죽은 상태에도 아직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영속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생명을 지니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보존될지는 보장되지 않았다. 

    Photo by Roman Empire Times on Unsplash

     


    그렇다면, 개념적 존재를 생명을 지닌 존재에 깃들어 영속하게 한다면? 
     
    불멸은 실천적으로 필멸의 존재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  생명을 지닌 존재를 통해서 생명을 지니지 않은(불멸의) 존재가 '생명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아쉽게도 생물학적인 '나'는 현재로선 생명을 지닌 존재에 깃들 방법이 없어 보인다. 나의 유전자를 새로운 생명체에 담으면 모를까. 아니, 그것이 바로 자손 아닌가?
     
    현재 이 육체를 지닌 생물학적 '나'는 필멸의 존재이다. 하지만, 나의 정보, 즉 나를 재건할 수 있는 나의 유전자는 나의 자식을 통해 영속할 수 있다. 불멸의 존재인 '인류'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을 통해 영속할 수 있고, 또한 불멸의 존재인 '나'는 필멸의 존재인 '나의 자손'들을 통해 영속할 수 있다. 
     
    즉, 나의 정보를 담은 다른 생명의 존재를 통해 나를 불멸이라 칭할수도, 필멸이라 칭할 수도 있다. 대상을 온전히 복원하기에 충분한 정보가 담긴 존재가 생명을 지닌다면 해당 대상은 생명을 지니지 않았다(불멸한다)라고 할 수 있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그럼 이 쯤에서 나를 물리적 종속관계에서 탈피하여 재정의하자.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사고과정을 자신이라고 칭하겠다.
    그리하면 나는 인류를 통해 불멸할 수 있다. 
     
    나의 조건
    1)  이 글을 쓰고 있는 물리적 존재가 하던 사고회로를 구현한다.
     
    나의 판정법
    2) 해당 존재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물리적 존재가 하던 사고방식대로 행위한다면 내가 존재한다고 판정한다.
     
    나의 사고과정의 산물들이 인류의 어딘가에서 언제든 복원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이루면 불멸을 이룰 수 있다.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까?
     


    불멸의 방법을 찾는 행위는 생명의 끝을 미루려는 적극적 행위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불멸을 이룩하면 생명을 잃으므로 생명을 잃기 위한 적극적 자멸 행위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자살과 같이 생명의 존재로서 생명의 성질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질을 영속하기 위한 방법 강구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는 순간 생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이룩함으로써 생명의 행위를 다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행위는 하나지만 생명이 없는 행위는 둘로 나눠진다. 멸망하여 행위가 회복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이거나(자살이 바라는 그 죽음),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 생명의 성질을 탈피한 행위(열반의 오른 것)이다. 

    Nirvana 는 열반이란 뜻이다.
    작가의 말.
    이우드의 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열반에 오르고 싶어지네요.
    열반에 오르면 죽긴 하겠지만,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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