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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돌이표. 끝이자 시작.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4. 4. 23. 02:21

    야, 일단 앉아봐봐. 그래야 자리가 몇개나 부족한지 알지.
     
    부대끼고 앉고 싶어 먼저 엉덩이를 들이밀었지만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 나는 변두리로 밀려나 어쩌다보니 가장 상석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내 시야 안에는 내가 가장 선배네. 원래 내가 앉아야했던 자리에 돌아온 것임을 깨달았다. 
     
    재잘재잘 수다 떠는 아이들. 시큰한 농담을 술잔에 담아 돌리는 대화. 때론 웃고 때론 눈을 피하고. 어후, 취한다. 난 이제 그만 마실래, 라는 듯 바빠진 젓가락들과 누룽지 벅벅 긁는 숟가락들. 
     
    가만히 앉아 사이다를 들이키자니 기분이 묘하다. 이런 기분 전에도 느껴봤는데. 그래, 맞아. 지엘 회식때도 이런 기분이었어. 분명 나는 같은 공간에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선배에서 후배로 바뀐, 이 격세지감. 여기에서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그토록 이 속에 있던 나와, 이 공동체라는 맺음.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오고, 베테랑들은 조직을 안정화하고, 시기를 다한 구성원은 조직에서 은퇴한다.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 각각의 육체와 빼닮았다.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고, 오래 머문 세포는 때로 밀려 탈락한다. 사람의 모든 세포가 교체되는 데에는 1년이 걸린다던데, 그럼에도 나는 그 1년 동안 변하지 않고 살아있었다. 세포는 죽었지만, 나는 그토록 살아있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낙화 中-

     
    현석아, 난 방금 흐뭇함을 느낀게 아닌 것 같아. 내 앞을 가로막은 유리벽에 박고 머리가 띵한거야. 나는 어느샌가 유리벽 바깥에 있었던 거야. 오늘에서야 이 유리가 만져지네.
     
    현석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가 봐. 이제야 이 동아리가 단순히 이 사람들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란 걸 느꼈어. 누군가는 우리 귀염둥이 현수처럼 오늘 들어오고, 또 나 같은 사람은 오늘 유리창을 등지고 통과했어. 등으로는 나도 모를 때 통과한 이 유리, 멈춰서 다시 이마로 통과하려니 부딪힌거야.
     
    아마 이 유리창, 너네가 만든 건 아닐거야. 사실은 내가 만든거지. 머리를 박으며 실체를 내가 만들었어. 나도 이제 이 유리창에 붙어있지 말고, 뒤돌아서 앞서간 선배들을 따라가려고. 나는 그렇게 이 동아리에서 희미해지겠지.
     
    그게 죽음이 아닐까 싶다, 현석아. 군대에서 난 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기분에 아주 불안했어. 다들 나를 잊을까봐.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밖보다 군대 안을 더 잘 알고 있더라. 어느샌가 난 이 조직의 새로운 세포로 자리잡았고, 이 조직에 엉겨붙은 거야. 나는 내가 온 사회에서 잠시 죽었고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거야. 
     
    하지만 어느 곳도 오는 이가 있고 떠나는 이가 있지. 언젠간 내가 갓 태어난 이 조직에서도 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럼 나는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거야. 부활하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 사회에 엉겨붙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우리가 적응한 순간 우린 이 공동체를 떠나는 거야. 우리 자신에게도 서운한 일이고 공동체 입장에서도 크나큰 손실이지만, 그런 어쩔 수 없는 과정이 있기에 조직은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어. 
     
    유명하디 유명한 베스트셀러 <이기적 유전자> 대로면 우리가 종족번식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함이래.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 못가 죽지만 유전자는 끝없이 살아온 것이지. 그래, 나의 죽음이 곧 이 공동체의 영생을 만들고 있는거야. 
     
    그러니 부디 꼭 잘 엉겨붙고, 잘 물러나렴. 
     
     

    작가의 말
    이 글을 돌림노래마냥 잇따라 군대 간 정정웅웅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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