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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경험, 감정경험에 대하여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5. 1. 25. 17:16
최근 장안의 화제인 반고흐 전시를 보러 갔었다. 나는 유화의 기법이 주는 입체감을 좋아해 그림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전시를 좋아한다. 또 반고흐는 유명한 화가니깐 공부를 하고 갔는데, 반고흐의 일대기를 따라 그림에서 나타나는 표현에 대한 그의 고민들과 나름의 돌파구를 관찰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요즘 사진을 찍는 대신 그림을 많이 구경한다. 사진을 찍으며 빛의 특성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사진은 광원의 빛을 담는 게 아니라 피사체에 반사된 빛을 담는 것이므로 피사체 고유의 색깔 또한 이해해야 비로소 담으려는 색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나는 색들이 어떻게 관계지어지고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떻게 변화하는지 경험해나가고 있다. 또, 세기의 명화들에 나타난 작가마다의 색채직관을 비교해보며 색의 주관성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있다.
나의 1픽, 르누아르의 <꽃병의 장미>
나는 색깔에 관심이 많다. 우리가 색을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색은 그 자체만으로 오묘한 감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한 색들을 섞어가며 우리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술은 사진보다 주관적이고 자유로우며, 추상적이지만 또 무겁다. 사진의 선명함이 주는 현장감과 완벽히 배치되는 방향으로 표현하려는 바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간다. 내가 에세이보다 문학을 더 좋아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색깔경험은 감정경험과 많이 닮아있다. 어릴 적에는 싫음과 좋음 사이에서 울고 웃고만 반복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라 화남, 부러움, 무서움과 같은 더 구체적 형태의 감정들을 배워나간다. 이 과정은 문장력의 발현과도 닮아있다. 간단한 단어들로 더 섬세한 어휘들을 배우고 그것을 딛고 세상을 더욱 예리하게 형언할 수 있듯, 우리는 가지고 있는 감정들을 기초 삼아 구체화된 감정들을 늘려 나갈 수 있다.
감정들을 하나둘씩 모아가는 한편으로, 단순한 감정을 더 세밀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파랑 대분류 안에서도 색조의 변화에 따라 하늘색에서 군청색까지의 차이를 느낄 수 있듯 하나의 감정 갈래 안에서도 각기 다른 세부 감정들 (예컨대 슬픔 안에서 서러움, 서운함, 미움, 우울함)의 미묘한 차이들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특정한 상황에 맞닥뜨려야만 경험할 수 있는 감정들도 있다. 얄미움, 후련함, 배신감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처음 겪어본 상황 속의 그 감정들은 반응하는 것도 처음인지라 주체하기도 반응하기도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 복잡한 상황을 겪어갈수록, 감정을 곱씹어볼 시간이 많을 수록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또,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섞인듯 섞이지 않은 채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애증이라든지, 시원섭섭하다든지, 쌤통이지만 한편으로 불쌍하다든지, 나도 모르게 정이 간다든지 하는 양가감정의 순간들을 겪으며 또 새로운 기법의 감정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떠올릴 때면 흡사 유화의 임파스토 기법 같다고 느낀다. 같은 나이프로 여러 물감을 오가며 색을 찍어바르다보면 다른 색이 미처 닦아내지지 못하고 남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 또한 또 기발한 색깔경험을 일으킨다.
painting by @justingaffrey_gallery
흥미롭게도, 감정은 색만으로는 또 비유할 수 없는 차원의 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가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보통 기분이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지만, 때로는 분을 못이기고 눈물이 터질 때도 있고 증오와 복수의 쾌감에 미소가 지어질 때도 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복잡도와는 별개로 그것을 몸소 느끼고 표출하는 것 또한 또 다른 영역의 감정경험이다. 처음 접해보는 복잡도의 감정을 접할 때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왜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 예컨대 너무나 기쁜 상황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이다. 감정의 폭풍이 나를 지나가고 난 후 찬찬히 곱씹어볼 때에야 그 감정을 분해해 이해하고 비로소 체득할 수 있게 된다.최근 소설들을 탐독하며 가장 놀라는 지점은 글로 표현된 그 모든 감정의 나열들이 다 되살아나 느껴진다는 것이다. 여러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감정들을 책에서 끄집어내 나 또한 이입하여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재밌다. 깊이의 차이는 내 감정 팔레트가 변화함에 따라 나날이 변화하겠지만 어쨌든 지금 힘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파고의 감정파도를 타보고 있다.
많은 감정들을 경험하고, 지니고 있는 감정의 팔레트가 세밀해지면 우리는 자신만의 감정을 조색할 수 있게 된다. 복잡한 감정을 체감해 나갈수록 우리는 그 감정들을 어떻게 내 몸속에 흐르게 하고 싶은지 고르게 된다. 감정들을 유심히 마주보고 그것들을 어떻게 체험하고 싶은지 고를 수 있게 된다. 대분류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부감정을 찾게 되고, 때로는 마음가짐을 달리 해 맞기 힘든 감정을 비껴맞기도 한다.
나 또한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껏은 감정과 거리를 두어 작아보이게 만드는 것을 연마해왔다. 그러다보니 감정들의 세밀한 차이들에 무감해진 것도 있다. 이제는 감각을 원하는 크기로 증폭해서 느끼는 방법을 연마하고 싶다. 내가 디테일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압도하지는 않을 정도로. 더 많은 감정을 이해하고 더 많은 감정을 표출해볼 수록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감각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소화하고, 더 많이 표현하자.최근 나에게 복잡한 감정을 토로해오는 고마운 친구들이 많았다.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싶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름의 뿌듯함을 느꼈다. 다만 내가 그 감정을 전달받는 것에 아직 많이 서툴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감정을 내밀하게 공유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가의 말.
이 글을 나의 친구들 L, C, H, K, 그리고 C 에게 바칩니다.작가의 말2.
열심히 펜팔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너무 재밌습니다.
언니 오빠 동생 동창 친구 원수 아군 적군 이 사람 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너도 나도 모두 다 환영합니다.'나의 글, 나의 노래 > 에세이를 써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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