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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클립으로 집 사기 - 교환과 가치에 대하여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5. 3. 8. 13:00
저번 달로 토플 성적이 만료되었다. 이전보다 더 나은 성적을 만들기엔 그 적에도 최선을 치른 것 같아 이 의무방어전에 자신이 없다. 그래도 어떡해, 하는 불굴의 마음으로 반짝 공부를 시작했다. 이 갱신의 굴레를 언제까지나 하게 될까, 하고 앞으로의 긴 취업길을 가늠해본다.
지방 대학교에 와서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은 내 소속을 말해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택시를 타도, 친척집에 가도, 단번에 이름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그게 어디냐면요, 카이스트는 아시죠? 카이스트 비슷한건데요..' 하고 매번 설명을 늘어놓기가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론 때로 진짜 카이스트를 다닌다고 사칭하고 다닌다. 뭐, 한번 듣고 흘릴 그 사람들에겐 그게 더 낫지 않겠어? 내 학력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거면서 제대로 알아서 뭐하게? 하는, 조금은 아니꼬운 열등감에서 온 나름의 기만책이다.
워낙 이름난 고등학교를 나왔어서 그 역체감이 크다. 합격 그 순간부터 명품택처럼 달고 다니던 가방끈인데, 그에 버금가는 대학 간판으로 갈아끼우지 못한 것 같아 때론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속이 편하다. 가진 지분을 정리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휴양 온 회장님인 양 잠시 쉬어가듯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다. 모두 나를 몰라보고 아무도 나를 치켜세우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나에게 걸던 기대가 줄어든 것이니까. 지친 나를 가다듬고 인문적 산책을 즐기고 있다.
졸업하자마자 이 안빈낙도의 삶에서 칼같이 방출되어 시한부의 잔고를 하루하루 늘려가며 살게 될테니 나름의 도움닫기를 하려 하고 있다. 물론 졸업의 허들을 넘기 위한 도움닫기이기도 하지만, 졸업을 넘고 나선 곧장 낭떠러지이기에 조금 더 멀리 도약해야 다음 화물칸으로 착지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나를 한껏 번듯하게 빼입히고 여기저기 덕지덕지 설탕물을 발라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이 작업이 때로는 돈 벌러 나가기 전 화장품을 있는대로 퍽퍽 끼얹는 매춘부같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들이미는 자기PR이 때로는 길가는 행인에게 치근덕대는 호객행위 같아 세상이 미워진다. 그럼에도 어서 나를 사용해줘, 하고 나신의 골반을 들이밀어 보잘 것 없는 내 아랫도리를 내보인다.
다음 칸으로 넘어가야 할 때면 왜 항상 그곳 인사팀의 간택을 받아야 하는지 신물이 날 지경이다. 그렇다고 홀로서서 갑이 될 베짱은 없으면서, 누군가가 내려주는 일과 월급에 편승하려는 을이기를 자처하는 게으른 꼴이면서 신세 한탄은 침 고일 새 없이 늘어놓는다. 우리들만의 노동요인 셈이다.
매번 시험점수를 갱신하고 학력을 갈아끼울 때마다 늘 스스로 빨간 클립이 된 기분이 든다. 얼핏보면 클립의 가치가 그간 차곡차곡 쌓여 그것을 인증하는 단계로써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물건의 가치는 교환하는 순간에 붙고 있다. 클립은 언제나 그대로였고, 그것을 저울질하는 시선만 잘 이끌면 가치는 오히려 상대 쪽에서 붙여주는 격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상대를 속이고 가치를 붙여주길 챔질하는 낚시꾼이다. 다만 나 자신을 바늘에 건다는 것.빨간 클립 기적의 주인공, 카일 맥도널드. ...
물건을 살 때의 가격은 판매자가 정하는 것 같지만, 뜯어보면 판매자가 단지 하는 건 구매자가 정해놓았을 마음의 가격을 알아맞히는 것이다. 이정도 비주얼, 이정도 퀄리티일 때 얼마 정도를 내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사가겠구나, 하고 구매자의 마음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판매자는 물건의 원가, 자신이 덧붙인 가치와 노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판매자는 영영 진정한 구매자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 없다. 심지어 때로 물건의 마진은 상품가지 외의 요인들- 예컨대 전기료 같은 고정지출-에 맞춰 책정되기 일쑤이다.
판매자는 물건의 생산과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리고 싶은 부분은 최대한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고, 좋아보이는 부분을 부각해 물건을 선보인다. 포장을 하기도 하고, 모호한 말들로 가치를 올려치기하려고도 한다. 구매자는 그 정보를 꿰뚫어 보려고 안목을 키우고, 동등한 위치의 다른 물건들과 비교한다. 그렇다보니 판매자는 경쟁 상품이 어떤 어필 방식을 택하는지 의식할 수 밖에 없고, 이 판매자간 눈치 싸움은 오직 돋보이기 위함이 목적인 진흙탕 싸움이 된다. 구매자는 시장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상품들 사이에서 비교하느라 쌓인 피로에 지쳐 적당히 세네번째에 우연히 집은 상품을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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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자의 시선에서 채용과정을 보지 말고, 구매자의 시선에서 봐보자. 채용을 하는 입장이 되어보면 생각보다 사람 뽑는 것은 신뢰를 빠르게 빚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료를 구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찾는 이기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에 따라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짧은 시간에 지원자가 자신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들이 자신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신뢰판단에 도움이 될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자신이 우세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채용이란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마트를 가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간택당하는 입장에서는 채용과정의 갑을관계가 오를 수 없는 신분차 같아 박탈감이 들 수 있지만, 고용자 또한 사람이 필요해 사람을 찾는다는 것을 볼 때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구매자의 마음이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편해진다. 우리는 고용주들이 만든 채용과정이란 기울어진 판을 부정하고 자신이 우위를 점하는 게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고용자는 지원자가 합류했을 때 잘 어우러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고 싶다는 것을 간파하고, 인간적인 신뢰를 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면접을 잘보는 방법 제1원칙이 '자신감을 보여라'인 것이다.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자질들은 서면으로 알아내기 쉽지 않다. 스펙과 수행능력만 보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만드는 것은 영양성분표만 보고 과자를 고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분명 섭취행위는 영양을 채우기 위함이긴 하지만, 영양만 챙긴다고 매일 역한 영양주스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섭취경험 또한 섭취목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채용 절차 첫번째로 서류를 택하는 것은 단지 서면필터링이 지원자당 평가시간이 면접보다 확연히 시간&비용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 전도된 접근방식으로 잃는 인재가 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가성비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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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채용형태가 필요하다. 과연 현행이 최선인가, 올바른가.이런 종류의 문제는 그 이해당사자들이 끊임없이 교체되기 때문에 해결되기가 어렵다. 더욱이 그 이해관계에 속하는 시간이 문제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작을 때 그렇다. 군대부조리 문제라던가. 수강신청 문제라던가. 중요한 시험에 대한 고통이라던가. 특히, 최선이 뻔히 눈앞에 보이는데도 현실화하지 못하는 문제는 당사자 입장에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때로는 이해당사자에 속하진 않지만 같은 신에 있는 제3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중대장이라던지. 교장선생님이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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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가격은 시장경제의 원리라는 빛좋은 사회원리로 구동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사후분석에 더 가깝다. 교환 전에 일어나는 심리적 게임이 가격을 결정하고, 그것은 때로는 억측과 오해, 기만을 범한 결과이다. 따라서 구매자로서 우리는 물건의 가치를 가격에 대응하여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가치는 대상에 영원히 종속되어있는 속성이 아니다. 개밥에 도토리도 도토리묵 쑤려 할 땐 없는 것 같이, 가치매김은 교환에서만 필요한 개념이지 그 외의 순간에는 빛바래는 순간적인 속성이다. 거래를 마음먹지 않는다면 어느 물건이든 가치는 없거나 셀 수 없는 것이다. price-less 하면서 priceless한 것이다.'나의 글, 나의 노래 > 에세이를 써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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