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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이유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3. 10. 16. 14:07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한없이 자신이 없어지는 나지만, 곰곰히 생각해본 나의 짧은 생각을 담아본다.
저녁 밥상 앞에 앉았다. 입맛을 다시며 물을 한모금 꿀꺽 마시고, 내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고 밥을 한술 퍼서 입에 넣는다. 쌀밥의 단맛이 올라오는 동안 무슨 반찬을 먹을지 고민한다. 반찬을 고르는 순서, 빈도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골고루 먹기를 지향한다. 모두 공평하게 먹기 위해 순서를 정해놓기까진 안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걸리는 대로 집지도 않는다. 반찬을 쭉 둘러보며 이거 금방 먹었던가, 하고 잠시 떠올린다.
반찬은 순서가 있기도 하다. 고기반찬을 먹고 나선 김치를 집는다던지. 밥을 먹고나선 된장찌개를 떠먹는다던지. 서로 어울리는 맛, 서로 잘 섞이는 맛, 앞 반찬의 부족하거나 지나친 맛을 조절해주는 뒷 반찬의 맛. 달달한 반찬 뒤엔 짭짤한 반찬. 느끼한 반찬 뒤엔 새콤한 반찬. 이런 맛의 흐름에 맞추어 반찬을 집는 순서가 찬찬히 배열된다.
보통 백반을 차려먹더라도 메인 테마가 있기 마련이다. 고등어조림이라던지. 소고기 구이라던지. 특별히 메인 디쉬가 없더라도 반찬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먹게 되는 반찬이 있다. 아무리 골고루 먹기를 신경쓰더라도, 자주 젓가락이 가는 반찬들이 있다. 가장 맛있는 반찬. 식사 교향곡의 가장 후렴구가 되는 반찬.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다. 대놓고 메인 테마로 놓인 반찬이 없을 때면 각자 입맛에 맞는 반찬을 찾는다.
때로는 식사 전 물밑작업을 하기도 한다. 반찬 놓는 것을 거들며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슬쩍 내 자리에 가깝게 가져다 놓는다. 가까이 두게 되면 내 시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자연스레 커지게 된다. 가까우니 집기도 편하고, 많이 집어도 흘리지 않을 수 있다. 멀리 둔 반찬은 맛있으면야 열심히 손을 뻗겠지만, 밥상 위로 멀리 팔을 뻗으면 다른 사람 젓가락에 통행 방해를 일으킨다. 콩자반 같은 반찬은 조심스레 집중해 집어야 하는데, 멀리 있으면 그릇들에 가려 보고 집기 힘들다. 얼른 집고 얼른 밥그릇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도 부담 중 하나이다.
내 앞에 갖다놓은 반찬만 먹다보면 엄마가 눈치채고 일부러 반찬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만 먹지 말고 건강한 것도 먹어, 하면서. 내 앞에 놓인 반찬의 지리적 이점을 놓치지 않으려면 눈치있게 다른 반찬들도 먹어야 한다. 반찬을 나만 먹을 순 없으니깐. 하나만 많이 먹다간 건강하지 못하니깐.
엄마가 새로 만든 반찬은 열심히 먹는 편이다. 새로 맛보는 맛이니깐. 맛있는데 많이 안먹었다간 엄마가 다시 해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깐. 우리집의 식탁에 자주 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초반 등장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요하다.
반찬만 열심히 찾다보면 내 가장 앞에 놓인 밥을 소홀히 먹기도 한다.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국을 남기기도 한다. 아쉬운대로 마지막에 남은 밥을 말아 식사를 든든하게 마무리한다. 살짝 식은 것이 아쉽다.
직접적인 비유 해석은 의미를 그르칠 수 있어 덧붙이지 않겠다. 밥먹으면서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반찬에 그 의미를 묻혀보았다. 논지를 확장하기 위해 이것저것 특징을 잡아보려 하니 의도하지 않은 의미들도 섞여있고, 논지를 흐리는 것들도 있다. 얼추 비슷하다, 정도로 맺어본다.
사람과 거리가 생긴다는 것은 만날 기회가 적어지고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애써 만나려 노력하지 않아도 만날 일이 적다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현생의 시야에서 장면을 자연스레 할애하지 않게 된다. 할애를 하지 않게 될 수록 점점 나의 시야라는 영화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저 맥거핀으로 일축된다.
인간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란 없다. 입력될 때에도 원하는 대로 받아들여 소화하고, 이마저도 그 색깔과 향, 맛을 금방 잃는다. 뭐든지 복합적인 지각은 금방 분리분해되어 잊힌다. 향과 맛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향과 맛을 떠올렸을 때 뇌리에 맴도는 것은 그때의 시각적 장면, 상황, 오래도록 기억된 기초적 맛에 의존하여 간신히 재구성해내는 것들이다. 우리 인간은 복합적인 것은 담지 못한다. 단지 느끼고 지나갈 뿐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또한 인지하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내재된 감각이 아니다. 기억의 생생함의 정도에 의존하여, 그 사이에 지나간 정보들의 밀도에 의존하여 간접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그러니 열심히 집중하면 시간이 훌쩍 흘렀다고 느낄 때도 있고, 생각보다 시간이 안흘렀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사람간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모두 예측하기 어려우며 밀도 있고 의미 충만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비언어적 표현으로 교감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느끼며 소통하고 서로의 뇌를 느낀다.
술에 취할 때면 우리가 얼마나 수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술을 먹으면 집중력이 크게 떨어져 하나하나 그 의미를 느리게 파악하게 된다. 그렇게 테이프를 늘려 선택적으로 우리가 주고 받는 소통들을 조목조목 보다 보면, 우리가 나누는 시간들이 얼마나 압축적인 정보 교류과정인지 알 수 있다.
논지로 돌아와, 우리에게 만남은 그렇게 큰 용량의 데이터인데, 그것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소모한다. 새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담기 위하여 이전의 정보들은 간추리고 골조만 기억에 남긴다. 그렇게 남은 '추억'들은 시간의 요소가 없다. 정지해있는 정보이다. 마치 연주회에서 음악을 들을 때와 오직 악보만 보고 그 음악을 떠올릴 때와 같다. 그 골조는 같을지 몰라도 그 순간의 sensation 을 모두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만남이 끊기게 되면 그 어느 데이터보다 더 빨리 잃는다. 기존 데이터의 밀도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정지되어있는 정보는 곱씹게 되고 수정되지 않는다. 때론 왜곡이 되고 편향이 된다. 손실압축이 되기 전에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한 의미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언젠간 지워진다.
우리 서로의 존재는 끊임없는 데이터의 흐름이다. 우리는 그 흐름을 분절하여 저장하려 하지만, 아무리 분절한들 아무리 많이 담는들 그 유기적 흐름 자체를 담을 수는 없다. 즉 우리 앞에 서있는 병건이와 우리 머릿속의 병건이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병건이와의 만남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머릿속의 병건이가 실제 존재인 양 거꾸로 생각하게 된다.
만남이 뜸해지게 되면 이 거꾸로의 인지과정이 계속되고 결국 머릿속의 병건이가 원관념이 되고 우리 앞에 서 있는 병건이가 보조관념이 된다. 주객전도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여 수정해야 할 금형이지만, 금형이 방치되어 차갑게 굳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병건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물동이를 가지고 흐름을 논하는 것은 우리 뇌의 저장과 기억사용의 메커니즘적 결함이다.
강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흐름을 양손가득 떠본다 한들 그것은 강이 아니다. 내 손에 쥐어진 그것을 강이라 인식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강이란 개념을 영영 잃게 된다.
작가의 말
소설가들이 왜 자신 작품에 대한 해석을 내놓지 않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의미를 짚어주는 순간 그 의미는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게 됩니다.
의미를 짚어주지 않음으로써 그 의미를 어렴풋‘이라도' 전달하는 것입니다.
모호함이 비유의 최상격 결과물을 위한 전략이며, 왜곡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무손실 전달입니다.'나의 글, 나의 노래 > 에세이를 써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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