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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지고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3. 10. 11. 08:00
요즘 많이 듣는 말미 표현이다. 듣는게 하도 열받아서 글을 써본다.
과제가 너무 많았어가지고 이번 학기 내내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겹강 듣는 친구가 하나씩은 있어가지고 할만은 했던 것 같아요. 어제 너무 더워가지고 밤에 한숨도 못잤어. 바쁜데다가 아파가지고 고생했어요. 그래도 할부 남은게 있어가지고 돈이 없어요.
일명 ‘해가지고’ 말미는 그 앞에 이유가 오고 뒤에 결과가 따라온다. 보통 결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전달하고 싶을 때 쓴다. 불가피함을 강조하며 나의 책임을 줄이고 숨기는 화법이다.
해가지고 말미는 그 특유의 일정한 리듬과 음정이 있다. 해,가,지,고 가 같은 8분음표에 파파레솔 의 들어갔다 나오는 음정. 때론 파솔레파 일때도 있다. 이 때는 ‘가’를 좀 악센트 걸고 4분음표정도로 끌면 된다. 해가!지고~ 앞에 나온 경위(?)를 더 강조하게 된다. 뒤를 살짝 음정파도 슬쩍 타주면 불쌍함이 고조된다.
해가지고 말미는 말하는 데 있어 완급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해서’ 보다 ‘해가지고’를 넣으면 중간 시간이 끌어져서 생각을 자연스레 끊어서 듣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표현의 앞뒤가 맥락적으로 끊어진 내용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결과적으로 맥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온점처럼 끊지는 않고 적당히 붙여놓은, 마치 쉼표같은 역할이다.나는 가끔 활자로 된 언어가 가진 한계들을 실감한다. 우리는 평소 말할 때 속도를 조절하기도 하고, 음정을 주기도 하며 의미를 자유롭게 표현한다. 좀 더 길게 쉬어가기도 하고, 이악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린 소리만 들어도 화자의 표정과 태도 등을 얼추 느낄 수 있다. 활자에서 그 integration 을 담기란 너무 어렵다.
한창 중세국어나 프랑스어를 배울 때는 한글에도 성조 표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단이나 높낮이를 표현하는 기호들만 차용해도 활자 표현이 훨씬 풍부해질 것 같았다. 개발자의 관점에서 성조를 입력할 수 있는 자판 입력 방식 같은 것도 생각해봤었다. 문장을 다 쓰고 악센트 주고 싶은 부분을 집어올리면 글자 크기가 커진다던지.
내가 내린 결론은, 어렵다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변화라는 것이다. 휴대폰으로 많은 텍스트를 치는 세상에 입력이 어렵거나 속도가 더디면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요즘 문장기호도 잘 안쓰고 긴 문장도 잘라서 보내기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타협점에 있는게 해갖고 말미 정도인 것 같다. 활자로 표현가능한 길이늘리기.
처음엔 너무 열받는 표현이란 인상이 심했는데, 생각해보니 되게 integral 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활자로 활자언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는, 그런 말미이다. 보통 내 글은 쉼표가 남용되곤 하는데, 이런 표현들을 잘 모아서 잘 써먹어보고 싶다.작가의 말
그래가지고 댓글가지고 이런 저런거가지고 장난치면서 재미 챙겨가지고 가세요.'나의 글, 나의 노래 > 에세이를 써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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