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워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3. 10. 9. 00:34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천성적으로 깨끗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내 자신을 알기에, 스스로 깨끗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스물 세살 먹은 지금도 우리 엄마의 가장 큰 잔소리는 '씻어라'이다.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선 집에 있을 일도 적고 군대에서 많이 고쳐와서 잔소리의 횟수가 좀 뜸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엄마 눈에 나는 '샤워 드럽게 안하는 놈'이다. 방에만 누워 있으면 문장에 온점 찍듯 모든 잔소리에 '좀 씻고'가 붙는다.
어릴적엔 샤워하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샤워를 하려면 온갖 추위를 맞서야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계절 논쟁에서 무조건 겨울보다 여름을 고르는 나에게 샤워는 엄청난 겨울이다. 매번 목에 힘주어 주장하지만, 더위는 짜증이 나지만 추위는 죽어가는 느낌이라 더욱 싫어한다. 샤워의 과정에서 추위와 싸우는 매 모먼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일단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 옷을 벗어야 한다. 그럼 일차적으로 냉기로부터 난 무방비하다. 그 상태로 찬 화장실 바닥을 걸어 들어가 샤워 부스로 들어가야 한다. 샤워 부스 유리는 초겨울 강가 살얼음을 떼다 놓은 듯 차갑다. 얼른 들어가면 되니 여기까지는 그나마 참을만하다.
첫번째 챌린지가 하나 온다. 바로 수도꼭지를 여는 것. 우리집 수도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는데, 중간 레버를 돌리면 샤워호스 또는 미스트 샤워기로 물이 나온다. 정면 여러 노즐로 물이 사방으로 튀는 미스트 샤워 모드로 되어있는 날엔 시작부터 세찬 장마비를 맞고 시작하는 것이다. 가끔씩 아빠 놀래킨다고 모드 바꿔놨다가 제 덫에 걸려 된통 당하곤 했다.
두번째 챌린지는 우리집 보일러와의 눈치게임이다. 어릴적 우리집 보일러는 변덕이 심했다. 초반에 따뜻한 물이 나오기까지 좀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아까운 물은 추위에 그나마 강한 두 발을 씻거나 옆에 놓인 큰 물동이에다 샤워호스를 넣어놓고 있곤 했다. 물동이에 넣어놓은 샤워호스가 제멋대로 뒤집어지는 날엔 또 찬물벼락 맞는 것이다. 몇번 된통 당하고 나선 샤워 헤드에 물바가지를 씌워두는 요령이 생겼다. 여담으로, 받아놓은 이 찬물은 샤워 후 화장실 바닥 청소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어느 정도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또 나의 최적의 온도를 찾기 위한 미동나사질이 시작된다. 조금만 틀어도 냉면 신세가 되고, 조금만 틀어도 삼계탕 신세가 된다. 왜 도대체 샤워수도는 미세조절이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지. 그러다 내가 타협하던 보일러가 안정을 찾던 원하는 온도를 찾으면 얼른 씻어야 한다. 왜냐, 언제 냉기쇼크가 올지 모르거든.
냉기쇼크란, 내가 맞춰놓은 온도에서 갑자기 찬물로 바뀌는 현상을 일컬으며, 샤워와 친해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집 보일러는 뜨거운 물을 한번 끓여서 쟁여놓고 조금씩 흘려보내는 구조인 듯하다. 그 온수 탱크에 물이 바닥나는 순간엔 갑자기 냉수가 콸콸나온다. 목뒤를 씻고 있다가 당하면 그만큼 심장에 안좋은 것이 없다. 한번 냉기쇼크가 오면 이미 온수의 수용력이 바닥났다는 이야기이므로, 그 이후는 냉기쇼크와 함께 온기쇼크도 여진같이 시도 때도 없이 오기 때문에 샤워를 한시빨리 끝내야 한다.
이정도는 누구나 겪는다고? 여기서 끝났으면 나도 샤워를 좋아했을 거다. 아무리 인프라가 좋아도, 우리집은 구성원들이 복병이다. 엄마가 설거지를 시작하거나, 형이 화장실 물을 내리는 순간엔 어김없이 냉기쇼크가 온다. 그래서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 꼭 샤워 선포를 해야 한다. 그럼 그런 실수들이 줄긴 하는데, 때론 '주도적인 실수'의 정황이 의심될때도 있다. 설거지 안하기로 약속해놓곤 냄비 물을 받는다던지.
또, 우리집은 '주도적인 실수'도 있지만, '주도적인 훼방'도 있다. 그중 가장 큰 적은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는 매 샤워끝엔 빼놓지 않고 냉수찜질을 하고 나오시는 씹상남자이시다. 그에게 찬물이란 그저 혈액순환을 돕는 보약이다. 그런 모습을 아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으신지, 가끔씩 샤워하는 도중 벌컥 들어오셔선 샤워부스 유리 너머로 찬물 한바가지를 촬싹 끼얹고 도망가신다. 날아오는 걸 보고 피해도 튀는 물때문에 닭살이 머리 끝까지 돋는데, 보지 못하고 직빵으로 맞는 날엔 일주일간 샤워를 엄두도 안낸다. 매번 당하지만 동일한 공격은 아버지에게 먹히지 않으니, 분통이 터진다!
우리가족 전통의 '주도적인 훼방'에 비하면 참을만 하지만, 샤워를 끝내고 물기 닦는 동안 추운 것도 작지 않은 공포이다. 몸을 연신 녹이며 수없이 고민하다가 끝내 수도꼭지를 닫는 순간부터 나는 숨을 딱 참는다. 그 직후 샤워부스를 (유리에 닿지 않게) 탈출해 미친듯이 수건질을 한다. 몸을 말리고 머리를 말리기 전에 얼른 옷을 입는다. 이렇게까지 하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추위와 전투의 막을 내린다. 샤워를 하고 나선 이불속에 꼭 들어간다. 그 속에서 냉동고기마냥 가만히 포장되어 있으면 그간 박탈당한 온기를 충전하며 동장군과의 전투로 잔뜩 곤두선 나의 신경을 진정시킨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어릴적엔 목욕을 훨씬 좋아했다. 한번 받아놓으면 냉수쇼크도 없고, 아빠가 찬물을 끼얹어도 온수 완충용액이 나를 지켜주니깐. 지금도 그래서 목욕, 그리고 노천탕을 좋아한다. 돈 많이 벌어서 욕조 있는 집에서 살거다.
내가 샤워를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다보니 글이 길어져버렸네.
다음편에서 만나요.
작가의 말
지금은 잘 씻어요.. 오해 없길 바라요'나의 글, 나의 노래 > 에세이를 써보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가지고 (2) 2023.10.11 나를 위한 청결, 너를 위한 청결 (4) 2023.10.10 학문의 길을 접은 이유(2) (0) 2023.10.06 학문이란 무엇인가 (0) 2023.10.05 학문의 길을 접은 이유 (1) (2)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