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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문의 길을 접은 이유(2)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3. 10. 6. 23:26

    ('학문이란 무엇인가' 예고편에서 이어집니다.)
     
    그렇다. 나는 지구평평이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우리 천문학도 친구들은 주체하지 못하는 화를 눈에 담고 침이 마르도록 나를 퇴마하려고 애쓴다. 그 광경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으로도 지평이로서 계속 살게 하는 엄청난 유흥거리다. 하지만, 우리 지구둥글이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사실 나는 실제 지구가 평평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구가 평평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자, 흥분들 하지 마시고, 이 글에선 어떤게 옳은지, 왜 그런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진짜 왜 지구가 둥글 '수 밖에 없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했드랬다. 결국 그나마 논리적인 것 같은 답변에 도달했다. 그리스 어떤 아저씨가 A 도시에서 잰 그림자 길이와 B 도시에서 잰 그림자 길이가 달랐다는 것이다. 그걸로 유추해볼 때 지구의 단면은 둥글고, 그 지름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학이 막 들어가니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이야! 드디어 지구가 왜 둥글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구나!' 하며 좋아했던 경험이 있다. 
     
    그렇게 한참을 지둥이로 살다가, 어느 날 NASA 에서 뛰쳐나온 과학자의 '폭로' 영상! 을 보게 되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NASA 출신 과학자였는데, 그가 지구가 평평한 '과학적 증거'를 대면서 지구가 '둥글지 않은' 증거도 내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의 오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너무 어릴적 본 영상이라 조목조목 기억나진 않지만, 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열심히 반박해내는 모습 그 자체로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실 나는 지구가 둥근 증거나 평평한 증거에 대해 이젠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지평이를 자처하며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논의라는 점이다. 지구가 평평해도, 지구가 둥글어도, 심지어 동시에 만족해도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다.


    과학계에는 '최선으로의 추론' 이라는 개념이 있다. 위키백과에서 한문장으로 정리한 말을 빌어 보자면 이렇다. 

    같은 현상을 설명해내는 두 주장이 있다면, 더 간결한 것을 선택하라

    지동설과 천동설도 비슷한 예시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천동설이 절대 틀려서 도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동설로도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설명이 모두 된다. 다만, 천동설에 따르면 금성은 가끔가다 뒤돌아서 탭댄스를 추는 행성이 된다.  그 내용이 복잡하고, 다양한 가정과 '우리가 모르는 세상의 원리' 같은 가정들이 많은 것 뿐이다. 과학계가 지동설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최소한의 가정으로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과학계가 지동설을 인정하는 이유는 옳기 때문이 아니라, 보기에 아름답기 때문이다. 
     
    과학은 하나의 설명을 구축할 때에 그 간결함, 미학에 굉장히 집착한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이미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집착할 때가 있다. 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세상이 아주 질서정연하고 완전한 규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우리 세상은 천동설처럼 복잡하게 이뤄졌을리 없어!' 라고 외치며 보기 불편한 설명들을 열심히 걷어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좋아하는 애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을 향한 그린라이트라고 해석하는 불쌍한 아이의 모습과 같다.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가 잘 되는 수준에서 '아, 이정도면 간결하다!' 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능력이 부쳐서 더 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수준에서 간단하게 이해되는 공식들로 세상이 이뤄져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모든 숭고한 열정들은 결국 자신들의 눈에 보기 좋은 것만 골라 담는 뷔페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되는 것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해되는 것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직관의 범위 안에서만 우리는 옳다 느낀다. 이것은 절대 자연을 이해하려 하는 행위라 할 수 없다. 자연을 수단으로 삼은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간 제일주의 정신의 오만함이다!
     
    이것이 내가 순수과학을 놓게 된 순간이다.


    한편으로, 오컴의 면도날이 과학과 인생에서 낭만과 유머를 뺏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탭댄스 추는 금성. 얼마나 귀여운가! 남극으로 비행했다간 낭떠러지에 떨어진다. 얼마나 재밌는가! 무병장수하는 게르마늄 팔찌. 얼마나 유쾌한가! 과학은 우리에게서 신을 빼앗았고, 깜깜한 밤을 빼앗았다. 천국과 지옥을 빼앗았다. 우리의 조상을 원숭이로 만들었고, 별자리 속 헤라클레스를 하늘에서 지워버렸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이란 매로 몰아세워 하나도 놀 줄 모르는 범생이로 만들고 있다. 비록 과학으로 삶이 윤택해졌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내면으로 메말라가고 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
     

    작가의 말
    헉헉. 하지만 현생은 가혹한 것.
    생물실험 보고서에 무릎 꿇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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