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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대하여나의 글, 나의 노래/감자 글 2025. 1. 12. 22:43
문득 거슬리는 이 소음이 무엇인고 하니 화장실 환풍기 소리였다. 룸메가 또 켜고 나간 환풍기를 끄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풍기는 원래 항상 켜놓는거야.' 그것이 일리 있는 이야기라는 듯이 말을 하는 룸메가 속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을 열어두면 그만인 환기에 굳이 전기를 쓰는 것도 모자라, 습기가 다 가시고 나서도 항시 켜놔야 한다니. 당최 받아들이기 싫은 낭비적인 생활 습관이지만 싸워 굴복을 받아내기에는 또 너무 사소한 것이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그게 네 마음에 조금이나마 더 편하다면 그렇게 살자. 대신 내 귀에 거슬릴 때마다 아무 말 없이 꺼버리기로 조그마한 반항을 마음먹었다.
환풍기를 끄니 방에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소음을 제거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전보다 더 조용한 상태에 진입하는 느낌을 좋아한다. 더 깊은 심연으로 잠수해내려가는 기분. 배부름이 울대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는데도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넘어가질 때 느껴지는 그런 한계 극복의 쾌감을 느낀다. 나는 몇 분 정도 가만히 눈 감고 더 차분한 상태로의 하강감을 만끽한다.
그저께 점심에는 Y와 밥을 먹으러 나갔다. 재작년에 수학을 가르쳐줬던 후배 여자 애인데, 성격이 워낙 서글서글하고 웃음이 헤퍼 인상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 겹치는 수업이 있을 때마다 과제모임으로 초대했던 아끼는 후배다. 인사치레로 던졌던 밥약속이 마음에 걸렸는지 신년문자로 밥을 먹자고 제안해왔다.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간만에 보아서 그런지 유독 반가운 얼굴이었다. 우리는 기숙사를 빠져나와 학교 앞 식당가로 향했다. 어제 종일 내린 눈이 밤사이 얼고 오전 햇살에 살짝 녹아 가는 길이 미끄러우면서 질퍽했다. Y는 나이 또래 치고 대화를 이어가는 센스가 있긴 했지만 늘 화제를 시작하는 건 내 쪽이었다. 나는 이런 소극적 대화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대화의 한 프레이즈 끝에 꼭 찾아오는 찰나의 적막이 너무나 참기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전의 그것과 연관된 화제를 얼른 생각해내야 했다. 식사가 나와서 밥을 먹을 때에도 나는 쉴틈없이 바빴다. 우리 사이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 질문을 던져 놓고, Y가 적당히 대답하는 동안 나는 얼른 숟가락을 입에 밀어넣었다. 아직 다 씹지도 못했는데 답변이 끝나버리면 밥 씹는 소리가 턱을 타고 너무나 크게 들려 급하게 입 안에 든 것을 삼켜야 했다. 기나긴 대화의 사투 끝에 기숙사로 돌아와 방에 오니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구나, 하고 씁쓸해졌다.
나는 침묵을 싫어하지 않는데도 왜 둘 사이 흐르는 침묵을 견디지 못했을까. 왜 그 침묵은 어색하고 어려웠을까. 그것은 아마 더 이상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이 없는 것처럼 비춰져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티가 날까봐, 이 자리가 그리 편하지 않다는 게 들통 날까봐 그런 것 같았다. 가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 제 발 저려 나오는 행동이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그것은 서로 모르는 것이 없어 흐르는 소진의 침묵이어야 했다. 혼자만의 생각 퇴고에 빠져 내가 말할 차례를 잠시 잊더라도, 그것을 감지하고 내 생각의 페이스를 기다려줄 줄 알아야 했다. 당신이 내 페이스를 이해한다는 것을 나 또한 알아야 했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궁금해 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내가 꺼내고 싶은 것들로 대화를 채울 수 있다. 소진의 침묵은 더 집약된 다음 말을 구워내는 가마 속 시간이다. 인고하고 조심히 고른 만큼 다음 대화는 참숯처럼 검게 빛난다.
나는 나의 침묵을 함께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내가 마음껏 생각을 재잘대고, 모두 비워내고 나면 같이 침묵으로의 하강을 즐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뛰어 놀다 쓰러져 잠들 드넓은 들판을 찾고 있었다. 응시하고 생각의 숨을 고를 따뜻한 눈동자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너의 눈망울 속을 뒤진다. 얼마나 까마득한 눈을 가지고 있는지, 그 칠흑의 동공 속을 내달려본다. 마주 본 내 눈 속에서 너도 비슷한 것을 찾고 있었을까.
Photo by Jordan Christian on Unsplash '나의 글, 나의 노래 > 감자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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