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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반점과 인물사진
    나의 글, 나의 노래/감자 글 2024. 11. 16. 04:47

    차례가 돌 때까지 넉달은 족히 걸릴 도서예약 대기줄이 눈앞에 선했기에 노벨상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학교도서관 사이트로 발빠르게 <채식주의자>를 예약 대출했다. 부커상 수상 시절 몇 자 읽어보고 무섭다고 덮었던 책을 그렇게 다시 펴보게 되었다. 회상했던 것보다 곱절은 잔혹하고 세 곱절은 적나라했다. 검붉게 섬뜩한 <채식주의자>와 달리, 책 특유의 스산함이 좀 덜한 <몽고반점>이 나는 유난히 불쾌했다.

     

    내가 불쾌했던 지점은 다만 처제와 형부의 몸섞음이 아니었다. 내가 소설 밖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간략히 느낀 소감은 형부가 자신의 창작욕구와 성적욕구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 형부의 모습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보니 부끄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최근 나는 인물사진 연습에 매진해왔다. 나의 피사체가 될 단학기 모델들을 구인했고, 그들을 사진에 담으며 여러가지 촬영 기법을 연마해왔다. 모델비를 충당하기 위해 알바도 시작했기에 나는 이 값비싼 기회에 무조건 여성 모델을 구하고 싶었다. 워낙 사람을 찍기 쉽지 않은 마당에 여자를 찍을 일은 더욱 조심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성미에는 도통 감흥이 일지 않아 사진미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남성미를 일단 알아야 부각을 하던지 할 터인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으니 남성 사진은 촬영 구도를 잡는 게 막막했다.

     

    오늘도 스튜디오를 대관해 촬영을 마치고 결과물을 검토하는데, 문득 내가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속의 인물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인물의 여성미가 나타나는 지점들을 뜯어보는 내 모습이 갑자기 소름끼치게 변태스럽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성욕을 촬영 작업으로 우아하게 포장해 해소하려는게 아닌가, 옷만 입었지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건 포르노그래피인가,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상상 속에서 한참 영혜의 알몸에 꽃을 그리던 형부가 고개를 홱 꺾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이제 사진에서 더이상 사진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여성미를 담고 있었다. '사진은 예쁜 모델만 있으면 장땡이야'라 일갈하며 사진가로서의 고민은 뒤로 제쳐두고, 여성모델들과 이야기 나누며 외로움을 덜고 있었고, 그 모델들을 사진에 담아 소유하려 하고 있었다. 나의 모습은 여색과 주색에 빠져 정치는 이미 뒷전인 타락한 임금과 같았다.

     

    음란물계에는 시간정지물이란 장르가 있다. 무뢰한들이 시간정지 능력을 사용해 여성을 정지시켜놓고, 여성의 몸을 무참히 유린한 후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면 여성은 자신이 강간당한 사실을 모른 채 생활한다는 식의 내용이다. 나는 그 무뢰한들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한다. 촬영 동안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여자의 얼굴과 몸을 뚫어지게 탐닉할 수 있었고, 그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없었다. 게다가 모델은 내가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시선강간'을 저지를 훌륭한 가림막을 돈 주고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성을 돈 주고 사고 있었다.

     

    혹여 내가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더욱이 심각한 점은 이젠 감흥도 없이 각선미를 좆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으로 학살을 총집행한 아이히만이 비춰보였다. 심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마지노선을 지나쳤다고 느꼈다. 나의 이런 뒤틀린 욕망이 이끌 모습을 한강은 2005년에 소설에 담아놓았고, 내가 변질된 촬영에 잡아먹힐 참에 노벨상을 수상해 나에게 보여주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스스로 성욕이 왕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갖가지 아름다움을 탐험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여체가 관심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나의 속내를 오징어회마냥 투명하게 뒤집어까는 이유는 이번 기회를 빌어 스스로 더욱 경계하기 위함이다. 성적 영역은 내가 경험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보다 더 숭고하다면 숭고한 가치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영역이라는 것을 유념한다. 나의 호기심과는 비교도 안될 크기의 인간 간 신뢰가 바탕되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유념한다. 순수하게 출발한 타 분야 호기심이 은근슬쩍 선을 넘는 것을 책임 다해 근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해야 한다.


    최근에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었던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가'에 골몰이 엇나간 대답으로 종결될 뻔 했다. 남성 사진을 마다하는 것만 봐도 인물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기록으로써의 사진보다 표현으로써의 사진이 되길 바랐지만, 나는 다만 창구로써 사진을 소비했다. 아직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면 내공을 길러야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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