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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와 언어
    나의 글, 나의 노래/감자 글 2024. 12. 10. 14:00

    사고에 있어 언어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인류는 어떻게 여러 종류의 언어형태를 초월하여 소통하고 있을까?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서로 다른 뇌내언어 기반의 사고들은 완벽히 일대일대응되어 또다른 뇌내언어로 변환될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들의 추상화된 형태의 기축언어를 상정할 수 있을까?


    우리들간의 사고 차이는 다른 동물의 사고와의 차이와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논증에서 말한 것처럼, 동일한 언어로 지칭하는 사적경험이 어떻게 같다고 보증할 수 있을까? 오직 사적으로만 관찰되는 것을 비교대조할 실천적 방법을 만들 수 있을까? 
     
    튜링테스트와 같은 문답식 검증방식은 귀납적일 수 밖에 없다. 중국어방 논증이 꼬집듯 그 검증방식을 통과하면서도 본질을 지니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본질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주목해야 하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테스트의 형태인 한 중국어방의 형태로 우회할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우리는(적어도 나는) 생각을 할 적에 머릿속 목소리로 문장을 읽듯이 떠올린다. 머릿속 모든 생각은 뇌내문장으로 표현되면서 흐름을 이어나간다. 우리가 이성적인 사고라고 개념화한 모든 것들은 일차적으로 뇌내문장으로 적힐 수 있다고 느낀다.  반대로, 뇌내문장 없이 동일한 명제를 형상화하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런 면에서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명확히 구현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구인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이런 뇌내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들은 직관적, 감흥적인 뇌내활동으로 분류되는 듯 하다.
     
    인류의 모든 생각들은 언어를 기반으로 생산되고 교류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논리,명제 체계는 모두 언어를 빼놓고선 말하지 못할 것이 자연스러워보인다. 다시 말해, 인간 언어의 특징은 우리의 사고기반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류의 이성적 사고들은 과연 언어 없이 구체화될 수 있었을까? 다른 고등동물들의 행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인간이 사용하는 종류의 언어가 없어도 일정 수준까지는 고등사고를 할 수 있어 보인다 (동물들이 고등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은 행동주의적인 접근에 기반한 유추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 왜 그들은 우리와 언어적 소통은 할 수 없는가? 언어를 상정할 정도의 고등사고까지 가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사고언어의 부재 때문인가? 그들이 만약 사고언어를 가지고 있다면, 인류의 그것과 상호변환될 수 있는(혹은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사고언어인가? 이런 질문들은 동물행동학자들보다 심리철학자들의 관심사에 들어가는 질문인 것 같다. 
     
    언어는 접근 의식의 본질적 생각단위들을 잘 설명하는 것 같으나, 현상적 의식은 은유적인 묘사로 밖에 표현해내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감 중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아, 이건 근데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분명 경험해왔고, 우리는 이런 현상적 의식을 '직감'이라고 부른다.
     
    과연 현상적 의식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은 내용의 부재 때문일까, 언어의 논외의 관념이기 때문일까? 다시말해, 현상적 의식의 형언불가능성은 외부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인가?


     
    필자는 우리가 사고언어를 기반으로 사고함으로써 생길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식적 한계가 있는지 논하고자 한다. 
     
    인간의 언어는 원자론적이다. 가장 작은 단위로 형태소나 단어를 가지고, 이보다 더 쪼개지게 되면 언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런 기본단위들이 일련의 순서로 배치되면 문장을 이루고, 이 문장에서 각 단위의 문법적 위치와 의미적 특성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성형된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생각들을 다시 단위로 삼아 더 본질적이고 날카로운 생각들을 이끌어내는 활동(사고활동)을 한다. 이 활동에도 연역논증과 같은 일련의 추론법들이 제시되어 있고, 우리는 이런 관습적인 추론법을 통한 직조물만을 사고활동의 새로운 결과물로 수용한다. 
     
    인간의 언어는 또한 규범적이다. 문장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문적 규칙은 우리 사이 일련의 합의안에 가깝다. 문장내 구성단위들을 배치하는 규칙과 그에 상응하여 창발되었다고 합의한 생각이 짝지어져있다. 다만 그 합의안은 무한한 창조성을 지니도록 만들어져있다(Fodor). 상정할 수 있는 문장의 형태가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첫째로 소통을 위한 훌륭한 도구이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생각을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전달함으로써 같은 명제를 공유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여러 연산장치 간의 협업 (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 토론 ) 을 통해 더 나은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즉, 언어는 우리의 사고력을 단일두뇌에서 복수 두뇌로 확장시키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언어는 또한 명료화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있는 개념들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규칙으로 표현해냄으로써 정보를 정리하고 그를 기반으로 지식체계를 축적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논증을 해결하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 언어로 표현한 문장의 본질은 각자 습득한 스키마에 기대어 받아들이게 되므로, 같은 문장을 보고 어떤 의미를 떠올리는지는 서로 확인할 수 없다. 또, 언어 종류마다의 뉘앙스가 다르고, 같은 언어라도 각자 경험하는 언어경험이 다른 것은 납득할만해 보인다. 


    조적식으로 논의를 쌓아가는 추론방식 말고 또 다른 접근 방식이 있을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어떤 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에 현재의 추론법들은 큰 징검다리들을 놓으며 도달하는 느낌이다. 굵직한 마일스톤(문장들) 을 차근차근 두는 방식이 아닌 물을 헤엄처 건너가는 연속적인 방식이라던지 하는 다른 형태의 깨달음 접근 방식이 있는지가 궁금하다. 궁극적으로는, 문장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서도 충분한 고등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사고의 가지를 확장하는 창발적인 순간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문장들에서 온다. 기존 추론법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활용해 사고세계의 빈틈을 채우는 방향(사고완결적) 으로 우리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한편, 전례없는 아이디어의 등장은 우리 사고세계의 새로운 접근법을 열어주고 결과적으로 인식과 사고세계 자체의 확장(사고확장적)을 일으킨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진리확장적인 사고활동은 이러한 영감이 유일한 기회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획기적인 영감을 세우는 사람들의 공을 높이 산다. 
     
    획기적인 영감은 어떻게 불러일으켜지는가? 영감 또한 깊은 진리보존적 통찰의 결과일까? 논의되어 온 주제들에 대한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영감은 일면 사고완결적일 수 있으나, 전혀 새로운 논의 대상을 가지고 오는 영감들은 그래보이지 않는다.  
     
    추론을 할 때, 논의 발전에 도움이 될 새로운 뇌내문장들을 생각해내려 할 때 새 문장이 내가 골몰하고 있는 주제에 걸맞는지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영감은 '어떻게' '힘써' 만들어지는가?


     
    포더는 계산주의적 마음이 가능하려면 계산의 대상이 될 token 과 event 들이 마음속에 representation 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에 대한 추론을 하려면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먼저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개념화를 하기 위해선 기틀이 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포더는 개념 학습을 집중하여 예시를 드는데, 개념학습은 다른 현상적 경험의 학습과 달리 경험 그 자체를 넘은 잉여의 명제가 창발되는 현상이다. 그런 개념 학습이 있으려면 먼저 1) 현상들을 인식하고 2) 입력에 대한 개념화를 하고, 3) 가설을 세우고 4) 다음 현상을 통해 귀납적으로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굿맨의 GRUE 논증을 예시를 들며 우리가 에메랄드가 grue 가 아닌 green 이라고 믿게 되는 데에는 이런 과정과 함께 더 단순한 가설을 택하려는 가치판단이 있는 것이고, 따라서 논증의 간결성에 대한 비교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짚는다. 
     
    인간의 외부언어는 사고언어와 공통점이 많다. 외부언어와 사고언어는 먼저 창조성이 뛰어나다. 어떤 복잡다단한 문장들도 만들 수 있고,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문장들도 해석해낼 수 있다. 하지만 외부언어를 아직 구사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나,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고등동물들도 사고행동을 보여주므로, 사고언어가 곧 외부언어로 만들어져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첫 외부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개념학습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촘스키에 따르면 첫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문법이 스며든 문장집합으로 문법 체계를 스스로 유추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단어를 배우는 것은 대상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배우는 것이지, 대상의 본질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을 아는 것이 단어를 습득하게 하진 않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와이즈먼이 말하듯 언어는 본질적으로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fuzzy-edged). Dreyfus 는 언어의 이런 특성 때문에 심지어 언어는 기계적 모델로 구현할 수 없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치고 이런 모호성을 tolerate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더는 언어의 이런 모호성 때문에, 한 사람이 언어를 완벽히 배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임을 교훈으로 내세운다. 그럼에도 첫번째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어떤 인지적 사고들은 언어 없이도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인공지능은 많은 동물계의 신경계를 모사한 형태의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물 신경계의 기본 단위인 뉴런은 임계값(활동 전위) 보다 높은 입력이 들어왔을 때 출력을 내놓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뉴런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 연결하고, 이들의 연결구조와 각각의 임계값을 조절해 인간 신경계의 활동이 할 법한 결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체계는 대응되는 연결구조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고의 본질이 뇌내 연결구조에 있다고 한다면, 뇌내 연결구조를 똑같이 본뜬 소프트웨어 모델 또한 우리의 심적 경험을 가질까? 우리가 복제한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벽돌을 이해하고 시공법에 따라 지었다고 해서 그 건축물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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