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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교수님 좀 소개해주세요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 2023. 5. 24. 01:29

    노선도만 보면 왕꿈틀이가 먹고 싶어진다.

     
    나는 자주 길을 잘못 든다. 지하철도 거꾸로 자주 탄다. 버스도 자주 놓친다. 구글맵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이 세상에, 어떻게 길을 잘못 드냐고? 간단하다. 그 좋은 지도를 보지 않기 때문이지. 
     
    나는 지도를 감으로 본다. 나의 시점을 경험(또는 연민)할 수 있게, 내가 길 찾아 가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우선,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될 지 알기 위해 지도를 켠다. 동서남북 보는 방법도 모르고, 알더라도 그 중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깐(ㅋ).  지도를 스윽 보고, '음, 이 방향을 바라보고 적당히 걸어가면 나오겠네' 라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감대로 걷는다. 태양을 곁눈으로 의식하며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조금씩 느낀다. 남십자성을 보고 희망봉을 찾는 대항해시대 선장처럼. 
     
    대중교통을 타는 방법은 더 시원시원하다(?). 먼저, 구글맵에 검색을 해서 이번 여정의 분기점들을 본다. 예를 들어 두번 버스를 환승해야 한다면, 내가 출발하는 정류장에는 몇시에 몇번 버스를 타야하는지, 환승은 어디에서 내려서 어느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지 본다. 그러고는 끝. "자, 다봤지? 이제 교과서 집어넣고, 컴싸만 책상에 올려놔." 오직 기억나는 대로, 버스를 탄다. 302번 버스인지, 203번 버스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일단 감이 오는 대로, 혹은 오는 대로 감을 실어 타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의 길찾기 신조를 소개하겠다. 내가 길을 찾아가는 방법의 핵심은, 

    '훤히 아는 길인 듯 행동할 것'.  

    어딜 가서든, 지금 역이 어딘지 굳이 두리번 거리지 않고 내리고, 그 다음 환승역으로 도착해서 방향을 고르는 것도 단숨에 한다. 내가 고른 방향이 그렇지 않은 방향보다 결코 더 확신이 서진 않지만, 원래 그 방향으로 가야하는 사람인 양 그 다음 지하철을 기다린다. 
     
    그래도 중간중간 불안하니 지도를 본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내가 가야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내 위의 빨간 점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면, 그럼 그렇지, 하며 멋쩍게 웃는다. 거꾸로 타서 그 다음 버스를 놓쳤더라도, 표정에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은 내가 티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원래 바로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려 했던 사람인 것처럼 무심하게 내려서, 출구 방향으로 걷다가, 타고온 지하철이 떠나면 반대방향의 벤치에 슬며시 앉는다. 
     
    이런 나의 모험같은 미로찾기는 가는 길에 재미를 더한다. 언제 또 나도 모르는 새에 목적지보다 출발지로 가까워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서스펜스는 지뢰찾기 게임을 방불케 한다. 전철을 반대로 타서 비싸게 결제한 고속버스를 놓칠 때면 코 끝이 찡하긴 하지만, 쿨-하게 넘겨본다.  
     
    나의 이런 아는체하는 길치의 모습 때문에, 나는 어딘가 갈 때마다 plan A, B, C 까지 세우고 간다. 이 역에서 반대로 탔을 때 얼마나 지체될 것인가, 이 버스를 놓친다면 다음 버스는 몇시에 있는가, 마지막 순간에 어디서부터 택시를 타야 하는가, 와 같은 예외처리 구문들을 짜놓고, 시간도 넉넉히 앞뒤로 한두시간 두둑하게 붙여서 내 실수를 만회하는 계획을 세운다. 어찌되었던, 아무리 헤메던 간에 도착은 할 수 있도록. 때론 그것도 모자라 그 전날 미리 가기도 한다.
     
    이런 미친 양의 완충 시간들 덕분에 의외로 얻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버스를 놓치고 환승역 잘못 내리고 등등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로 길치 모먼트를 부렸더라도 무조건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게 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plan A 대로 수월하게 오는 날은 약속시간보다 두 세시간 일찍 도착한다. 
     
    길에서 잃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당연히 아깝지. 근데 난 지도 뚫어지게 보면서 이 방향이 맞나? 하고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길잃는 거는 똑같기 때문에, 애초에 지도를 열심히 보려하지 않는다. 즉, 지도의 도움 하에도 심각한 길치이기 때문에 이 방법이 그나마 내 체면이라도 살리는 최선의 방책이다.  
     
    나는 왜 이렇게 길을 찾게 되었을까? 그건 아마 내가 시골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 떨어져서 이 복잡한 노선도를 보며 머리통이 터질듯 복잡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시골쥐인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옆 사람들이 행동하듯, 도시 소음에 질린 도시쥐 행세를 하는 것이다.
     
    다음부턴 나침반을 좀 들고 다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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