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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취미들/식물일기 2024. 4. 23.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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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각 절대역치" 라는 건 우리 감각들이 얼마나 작은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느냐를 나타낸 거에요. 우리의 눈이 얼마나 희미한 빛부터 볼 수 있는가, 우리의 피부가 얼만큼의 압력부터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그 최소의 한계를 나타내는 값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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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창밖을 한번 보세요. 요즘 새 잎이 돋아나는게 진짜 벚꽃 만개했을 때보다 눈이 더 즐거운 거 같아요. 이 새 잎들이 나면서 연두빛으로 나무들이 풍성해지는게 나날이 변하잖아요. 처음에 났던 잎은 이미 어엿한 진초록을 띄는 곳도 있고. 보면은 한 나무에서도 정말 많은 갖가지 색깔을 볼 수 있잖아요. 이렇게 색에도 절대역치가 있답니다..
     
    맞아. 요즘 하루가 다르게 잎이 무성해지는 것 참 보기 좋아. 저 많은 잎을 어떻게 다 준비했나 싶고. 이제 추운 계절은 완전히 가고 완연한 햇빛 쨍쨍함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겠지. 시험 전까지만 해도 벚꽃 잎에 도로가 흰색 꽃잎으로 옅붉게 물들었는데. 비가오니 꽃잎 카펫트는 빗물에 접혀 수로로 들어가고, 이젠 초록색 꽃들이 다음 차례로 피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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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우리는 사실, 감각의 크기보다는 이전 감각과의 차이를 더 중요하게 지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런것 같지 않아요? 이 강의실 마이크 잡음, 저희 학기 내내 이거 나는데 이젠 그럭저럭 수업 들을만 하지 않아요? 여러분 팔 소매 지금 한번 걷어보세요. 지금은 살짝 시원하고 바람이 느껴지는가 하면 조금 있다가는 내가 소매를 걷었는지 폈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느새 감각은 적응해버립니다. 또, 왜 화장실에 딱 들어갔더니 지린내가 엄청 나는데 조금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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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것 같기도 하다. 사실 봄이 왔다는 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주변모습 때문에 느낄 때가 많지.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야 꽃샘추위를 떠올리고, 꽃이 펴야만 진정으로 봄이 온 것을 실감하듯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우린 계절이란 개념을 생각해내지조차 않았을 거야. 
     
    시험이 끝나자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갑자기 들이치던 후덥지근한 바람을 단칼에 되돌려 보내버렸다. 후드티와 가디건을 옷걸이에서 다 빼내고 티셔츠들을 이제 막 걸었는데. 긴팔들은 다 접어서 침대수납장에 개 넣었는데. 당분간은 아직 주름 안 간 니트에 청바지나 입어야겠다. 
    도리는 집에 잘 있으려나. 오늘 토리 새 줄기 펴는 날인데, 잘 하고 있겠지?


    심리학 수업은 듣기엔 재밌는데 별로 실속있는 것 같진 않다. 약간 할머니한테 전래동화 듣는 느낌이랄까. 수업이 아니고 재밌는 연극 시간 때우기로 본 것 같은 기분이야. 가방을 책상 앞에 무심하게 내려놓고 침대에 벌러덩 뛰어든다. 에효. 수업 가기 싫다. 도리야, 나 대신 수업 가주면 안될까. 광합성은 내가 해놓을게. 오늘만 바꿔치기 하자. 나 식물인간 잘할 자신 있어.
     
    어우, 서늘한 바람이 머리맡 열어놓은 통창으로 들어와 내 이마위를 타고 몸까지 감싸 내려온다. 나는 몸을 돌려 엎드려 방충망 밖 도리를 본다.  얘, 도리야. 어제보다 추운 거 같지? 몸을 일으켜세워 방충망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오늘은 구름 때문에 배고프겠네, 우리 토도리 형제.
     
    요즘 변덕스러운게 한둘이 아니다, 그치? 새로 옮긴 집은 맘에 들어? 가뜩이나 곱절 큰 집으로 이사해서 몸살일텐데 날씨도 영 축축해서 어쩌냐. 참, 마음대로 안된다 그치?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습기는 충분한거 같네. 50%면 너 그냥 잎으로도 물 먹을 수 있겠는데?
    쟤네 봐봐. 쟤네는 너가 깨어나기 전에도 저기에 땅에 박혀 있었어. 네가 나오기 전에는 오늘보다 훨씬 쌀쌀했단다. 날씨가 더 추우면 이 비들이 하얗게 변해서 내려. 눈이라고 하는데 그걸, 쟤네는 그 눈들도 다 맞아가며 한 3개월은 그대로 버텼어. 네가 3월 20일에 나왔으니깐.. 너가 산 만큼의 세 배는 그 하얀 비를 맞고 살아남은 거야.

     
    이제 새 가지도 많이 자랐네, 우리 도리. 있잖아, 나는 사실 도리 네가 태어나기 전에 몇 번의 너와 같은 아이를 키우고 또 보냈단다. 걔네들은 오래 못 살았어. 너처럼 좋은 봄날에 깨어나지 않고 내가 가을에 난로 피워가며 봄이라고 속여서 깨웠거든. 가을이 지나 하얀 비가 내리는 추운 겨울이 오니 아직 겨울을 보낼 준비가 안되었는지 비실거리면서 키 크기를 멈추더라. 내 욕심에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주인을 만난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그런데 도리야, 너는 내가 봤던 아이들 중 가장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어. 그래서 너무 기특하고 너 덕분에 행복해. 난 도리 네 덕분에 봄이 오는게 너무 반가워. 넌 내가 봄부터 키운 첫번째 아이거든. 머리숱치기도 잘 적응한 첫번째 아이거든. 큰 집에 분갈이해도 살아남은 첫번째 아이거든. 뭐든지 너한테도 처음 해보는 것들일텐데, 의젓하게 해내는 것이 너무 기특해. 
     
    난 있잖아, 사실 너를 다른 도토리들 중에서 골라왔어. 원래는 쟤네들처럼 땅에서 뿌리내려 살아갔을 너를 내 욕심에 우리 집으로 데려온거야. 동생 토리 말고는 놀 친구가 없어서 심심하진 않아? 원래 나무들은 뿌리로 소통하고 먹을 것도 주고받고 한다던데. 내 욕심에 너를 데려온게 너를 평생 외롭게 한건 아닌지 아직도 고민해. 
     
    그래도 도리야, 우리 도리랑 나랑 토리랑 이렇게 같이 살자. 너희가 내 덕에 편히 사는게 아니라, 너네 덕에 요즘 내가 더 행복해. 비록 너희를 책임지는 입장에 있지만, 가장 도움받는 건 나 아닐까. 항상 건강해줘서 고마워. 어유, 이젠 잎파리도 단단해졌네. 집 옮기고 한창 붉게 열나고 축 쳐질 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린다. 그러니 도리야, 토리야. 이 아빠를 위해 부디 건강하게 자라나주렴. 
     
    그래, 너네는 나 때문에 살아가기 시작했지만 이제 나는 너네 보는 낙에 살아간다. 이전에 너네 없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참. 너네가 내 삶을 지금 송두리째 바꿨어. 아, 식물계에선 좀 실례인 표현이려나. 너네 덕분에 나도 새 삶을 얻고 산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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