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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행나무
    소소한 취미들/식물일기 2022. 6. 25. 08:18

    첫번째 식물은 은행나무 입니다. 제가 종자를 채취해서 직접 발아시켜 처음부터 키우기 시작한 친구입니다. 제 식집사 취미의 시작을 같이한 친구입니다. 오늘은 이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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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은행나무는 제가 군생활에 많이 지쳐있을 때에 만났습니다. 그 때의 저와 제 동기는 각자 많이 비관적이고 예민하게 변해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열심히 해커톤 대회를 끝내고 번아웃이 왔고, 군 특기도 달인이 되어 만사가 지루해졌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익숙해 꼭 타임루프에 갇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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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는 탈영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그래서 저희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찾기로 했습니다. 마침, 동기의 어머니께서 버섯을 키우기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도 식물을 키워보는게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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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는 식물 키우기 키트를 사서 허브 종류를 키워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뭘 해도 다른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저는, 평범하게 다 준비된 키트를 사서 하는 것이 뭔가 성에 안찼습니다. 너무 준비된 상태랄까? 뭐든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재밌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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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몇가지 생각한 것이 다음과 같은 저의 식집사 철학입니다.
    첫째, 나무를 키우자! 허브와 같은 풀들은 보통 한해살이 식물로, 아무리 길어도 1년 있으면 무지개 다리를 건너야 하는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가 되어줄 식물은 저 만큼이나 오래 굳건히 살면서 제 옆을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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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내가 직접 씨를 구해 씨부터 발아시키자! 묘목을 파와서 곁에 두면 뭔가 정이 안갈 것 같았습니다. 한때는 상담실 이사하는 날이었는데, 화분을 몇개 분양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식물들은 제가 처음부터 키우고 있던 식물이 아닌지라 정이 덜 갔고, 결국 이들은 부대 이발실 구석에 처박혀버렸습니다.또 한때는 소나무 묘목을 하나 파와 길렀는데, 이 또한 제가 지식이 짧아 금방 말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보아, 저는 식물의 탄생부터 지식을 쌓으며 곱게곱게 키워가야 정이 들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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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저는 부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씨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온갖 가로수란 가로수는 다 올려다 보면서 이건 무슨 나무지, 생각하며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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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은행의 어머니 나무는 제 군복무 부대의 식당 바로 앞에 심어져 있었습니다. 부대 식당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일방통행 차로가 있고, 은행나무들은 맞은편 본청 건물 뒤쪽으로 가로수처럼 줄줄이 심어져 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질 때면 본청 뒷길이 노오란 은행잎들로 덮힙니다. 여기에 심어져있는 은행나무는 유난히 은행 구린내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 은행나무는 그들 중 하나의 자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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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말고도 많은 씨앗을 찾았었습니다. PX가는 길 창고 옆 도토리(참나무), 행보관님이 여단장님 관사 앞에서 주워오신 밤, 막사 앞 주목나무, 단풍나무, 콩, 등등 오만가지 구할 수 있는 종자는 다 구해서 심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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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군번인 저는 부대 밖으로 식물들을 키울 비품들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휴가, 외출은 커녕 면회도 금지였기 때문이죠. 외부 물자 유입이라곤 택배밖에 없었고, 돈을 쓰자니 짠돌이 성격이 내키지 않아해서 결국 '부대에서 해결하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씨앗을 키울 흙은 부대 뒤 잣나무 숲에서 구해왔고, 화분대신 냉동식품 플라스틱을 사용했습니다. 인큐베이터용 휴지는 총기손질포로 대체했고, 햇빛 가리개는 ROKA 티셔츠를 사용했습니다. 삽은 행보관님 서랍에서 찾았고, 분무기는 이발실에서 빌려썼습니다. 하하! 어때요, 참 짠돌이스럽지만 얼추 잘 해결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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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튼 그렇게 온갖 씨앗들을 키워보려 했는데, 요상하게 다들 잘 싹틔우질 못했습니다. 한 한달 동안은 그 어떤 씨도 발아시키지 못했고, 흙들은 썩은내를 풍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온도 조절을 잘 해봐도, 아무리 찾아봐도 되질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고전하는 동안, 동기가 틔운 바질 키트는 무럭무럭 자라 모든 당직사관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전 요상한 박탈감을 느꼈고, 제 군생활은 더욱 힘들어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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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제게 희망처럼 찾아온 것이 은행입니다. 씨앗 싹틔우는 법을 공부하고, 인큐베이터 개조를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발아시킨 식물이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이것도 안되면 진짜 접는다고 마음먹었던 그 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은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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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희망을 보여줬던 첫번째 은행 싹들은 살아남지 못했지만, 저에게 할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결국 두번째 시도에는 10개 남짓의 은행을 싹틔울 수 있었습니다. 그 씨앗들이 연노란 줄기를 뻗어올리는 모습을 제 동기가 봤다면 좋았으련만, 그는 저보다 2주 일찍 전역해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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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말년을 행복하게 해준 은행들은 제가 직접 준비한 화분에 심어서 같이 전역했습니다. 분리수거장에서 직접 화분 다운 화분을 고르고, 하얀 색으로 락카칠을 해가며 이쁘게 만든 화분에 말이죠. 이 은행 덕분에 얼마나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처음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은행나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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