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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리얼
    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를 써보자 2023. 9. 7. 08:54


    시리얼의 맛을 표현해주지.

    허기진데 밥하긴 귀찮은 날 생각나는 맛.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을 때 생각나는  그 맛.
    씹으며 멍때리다 보면 잠이 서서히 깨는 맛.

    설거지 건조대에서 국그릇 하나, 수저통에서 숫가락 하나를 꺼내든다. 양손으로 옮길 여력이 없으니 식탁에 올려두고 냉장고로 향한다. 우유가 있으면 정말 다행이다. 우유통을 빼들어 찰랑찰랑 남은 우유의 무게감을 느껴본다. 오늘 올 때 우유 장 봐야 겠군. 

    식탁으로 돌아와 의자를 지익 꺼내 앉는다. 시리얼 박스는 항상 식탁과 벽에 맞닿아있는 곳, 영양제 무더기와 같이 있다. 박스에서 봉지를 꺼내고 돌돌 말린 입을 찾아 펴본다. 봉지의 뒷덜미와 목덜미를 잡는다. 목덜미를 슬슬 뒤쪽으로 만지며 적당한 양을 입구로 쏟아지게 나눠 잡는다. 딱 왼손 적당히 찼을 정도가 적당하다. 

    국그릇에서 숟가락도 빼지 않은 채로 봉지를 기울여 시리얼을 붓는다. 붓자마자 땅그랑 하는 국그릇 울리는 소리. 피치 높은 소리 뒤로 조용히 쏟아지는 시리얼들. 양은 두손으로 감싸쥘 정도의 모래산 정도면 된다. 슬슬슬슬, 또 후두둑, 샥 샥 샥 원하는 대로 부어본다. 

    봉지 윗꽁다리를 치켜들고 단정히 늘어뜨려 정리한다. 입구 부분을 두 세번 접어둔다. 이제 우유를 부어야지. 졸음에 힘 조절 잘못하지 않게 천천히 따른다. 우유는 시리얼산의 정상에 있던 애들이 동동 뜰 때까지 붓는 것이 취향이다. 우유를 마시기 위해 시리얼을 먹는 편이다. 

    먼저 그릇을 두손으로 모아잡고 애써 부은 우유를 마신다. 아직 흰우유 맛이다. 우유를 다시 채우고 나서 이젠 시리얼을 퍼먹어 본다. 와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맛. 조금씩 느껴지는 달달함은 시리얼 위의 설탕들이다. 식감은 얇은 나쵸 조각 같지만 또 짭짤하지는 않은 맛. 메타세콰이어 낙엽 사이를 걷듯이 부스럭 파스슥 씹는다. 식감은 과자같은 시리얼이 채우고, 입안은 우유가 빈곳을 채운다.

    시리얼은 식탁 위에서 맛이 변하는 음식이다. 양이 줄어들수록 시리얼은 부드럽게 붇고, 우유는 설탕을 머금고 달달고소해진다. 특히 오레오 같은 초코 시리얼을 먹으면 그 재미가 더하다. 눅국한 오레오는 별로 취향이 아니지만, 그 초코맛이 우러난 우유는 취향이다. 마지막 사발째 들고 마시는 우유 마지막 모금은 국밥의 아래 남은 밥알들, 혹은 봉지라면 부숴먹고 주어먹는 스프 가득 라면 부스러기 같은 맛이다. 

     

    숟가락 하나 국그릇 하나 밖에 설거지가 안나오는 착한 맛.

    우유만 있다면 오래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맛.

    아침밥의 거대한 문턱을 낮추고 든든한 하루를 쉽게 시작하는 맛.

     

    세상살이 시리얼로 살기 편해지지.


    유당불내증인 백지호가 시리얼의 맛을 별거 아닌듯 '그게 그리 맛있냐?' 하길래 함 끄적여봤다. 

    1일 1에세이 챌린지를 열심히 하고 있다만, 밤 늦게 달리기도 해야되고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일들이 겹쳐서 부랴부랴 쓴 글이 많다. 

    그 미안한 마음에서, 그리고 그럼에도 열심히 읽어준 백지호에게 고마운 마음에서. 오늘은 이 글로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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