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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관프로젝트_나는 왜 총괄까지 맡게 되었는가
    나의 글, 나의 노래/감자 글 2023. 7. 3. 03:31

    다산관 프로젝트가 끝났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막을 내렸다. 나는 왜 다프를 이끌기로 마음 먹었을까. 이 글은 내 5개월 대장정의 역사를 기록한 글이다.
     
    그 기원은 내가 기타를 잡기 시작했을 때로 돌아간다. 그 시작은 언제나 적재.
     
    나는 음악을 더욱 깊이 들어가 경험하고 싶었다. 적재의 야간작업실을 보며 합주에 대한 막연한 꿈을 키워왔고, 나도 비슷한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하나부터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다.
     
    적재 기타가 너무 멋있어보여서, 그리고 기타 홀로 풍부한 소리를 만들 수 있어서 통기타를 연습했다. 화성학 책부터 꺼내들며 한자한자 읽어나갔다. 코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곡의 진행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전혀 모른채로 일단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주먹구구로 배웠다. 
     
    수학여행의 <조개 껍질묶어> 같이, 어디든 가서 원하는 음악을 칠 수 있게 되고 싶어서 원래는 통기타를 고수했었다. 낭만있지 않은가? 어디든 기타 들쳐메고 가서 앞이 탁 트이고 엉덩이 한짝 놓일 수 있는 곳에 앉아 지금 드는 기분들을 가락에 담아 부르는 것이. 일렉기타는 사실 사일런트 기타로서 구매한 것이었다. 아무리 작게 쳐도 통기타는 집에서 도저히 칠 수 없으니깐. 반면에 일렉기타는 앰프만 안꽂으면 소리가 내 목소리보다 작으니깐. 
     
    혼자서 띵가띵가 치는 것도 재밌었지만, 야간작업실처럼 음악을 즉흥하며 다같이 음악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본래 밴드 음악을 찾아서 듣는 편은 아니었는데, 적재 음악을 듣다보니 밴드 사운드에 귀가 익었다. 자연히 내가 가지고 있던 일렉사운드에 대한 반감을 내려놓았다. 원래는 '근본은 역시 아날로그 사운드지!' 라는 보수적 마인드였다면, 어느샌가 '그래, 그냥 소리를 전기로 담는 것 뿐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23년 2월, 아레테와 일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레테와 같이 떠난 이 도쿄여행의 테마는 '커피&재즈' 였다. 낮에는 일본의 드립커피를 경험하고, 밤에는 일본의 재즈바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때 갔던 빅마우스 펍, 피트인에서 들었던 음악들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공간에 꽉찬 화음들의 춤사위, 곡의 와우포인트를 넣어주는 미묘한 변칙연주, 또 그 라이브 음악만의 짜릿함을 캐치하고 흐뭇하게 미소짓는 관객들. 
     
    나는 일본여행을 하는 와중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밴드들을 알아보았다. 대학 밴드는 복학생이라 닿는 연이 없고, 민사고 밴드로 눈을 돌렸다. 왜냐하면 민사고 졸업생 밴드가 정말 재밌어 보였기 때문이지. 음악 + 민사고 = 경민이 취향저격. 작년에 젊은피들이 이끌었던 <공개관측회>는 2년에 한번씩 공연할 예정이라서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선택지는 다프였다.
     
    그러한데, 연락해보니 다프가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코로나시대를 지나 작년에 재기를 꾀했으나, 지원자가 부족하여 불발되고 말았단다. 아닌중에 젊은피가 새로운 공연동아리를 만들었으니, 이젠 퇴역해야하는 순간인건가, 싶은 것 같았다. 
     
    학교 다닐때 어렴풋이 동경했던 다산관프로젝트가 사라진다는 것이, 그것도 내 눈앞에서 녹아내리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가슴아팠다. 낭떠러지에 매달려 손에 힘을 잃어가는 조난객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손이 잡은 가지를 놓치는 순간, 오직 나만이 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덜컥 "그렇다면 제가 총대를 매보겠습니다!" 를 보냈고, 옳다커니한 선배는 두 말 않고 내게 모든 계정 권한을 넘겨주었다. 
     
    떨어지는 손을 잡게 된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이 손을 땅끝위로 다시 끌어올려야 했다. 아니면 나도 딸려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마음먹게 되었다. 괜히 이상한 놈이 호기부리다가 동아리가 없어져버렸다는 고종순종 엔딩의 주역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특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4팀이 만들어질 정도의 인원이 모였는데, 22기 밴드멤버들이 잇따라 이탈하면서 한 팀이 존속불가 상태에 다다랐다. 급히 남은 인원들을 구조해 다른 팀에 붙였다. 그런데 또 다른 팀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파도 맞은 모래성을 어떻게든 붙들고자하는 발발떠는 손처럼 온갖 방법을 다 썼다. 나가려는 사람들을 계속 설득하고, 추가지원을 받고, 내가 건반과 기타2를 맡으며 결국은 세 팀을 지켜냈다.
     
    공연날짜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원자를 늘려보겠다고 공연 날짜를 불투명하게 만든 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모두 가능한 하루를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막에서 바늘찾기 같은 일인지, 그걸 어떻게 몰랐을까. 5월은 연습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안되겠고, GLPS는 가야겠고, 2학기까지 미루자니 장기전에 힘빠질 것 같았다. 결국 7월 1일로 다수결 결정을 밀고가기로 했다.  
     
    세 팀이 출발을 하고 나서, 공연때까지는 잠시 학업에 몰두했다. 다들 연습을 거의 안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공연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막연해서 잠시 눈을 돌리고 살았다. 공연 예정 날짜가 다가올수록, 공연장을 미리 잡지 않으면 남는 공연장이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이제는 더이상 미루다간 나도 딸려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 때, 운영팀의 정기 회의 시간을 잡았다. 정기적으로 회의하게 되면 일이 없어도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운영팀끼리 의기투합하여 공연장도 알아보고, 홍보 계획도 세우고, 포스터도 제작했다. 공연장도 잡고, 이 행사 저 행사 기획을 해보았다. 그 모든 행사는 시간조율 문제로 불발이 났지만서도, 어떻게든 중간중간 사람들이 커넥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결국 마지막주에 다들 급하게 친해졌지만. 
     
    총괄은 제쳐두고 밴드 합주를 할 때면 너무나 행복했다. 밴드원들이 너무 행복해보인다고 그랬었다. 실제로 그랬다. 틀려도 너무 재밌었다. 나의 이 행복을 같이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그 공연을 어찌되었던 완주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더 바삐 일하게 만들었다. 


     포스텍에서 학업과의 씨름이 끝나고, 나는 아레테의 신촌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연이 3주 뒤로 다가온 그때부터 나는 온 신경을 다프 공연을 완주시키는 데에 쏟았다. 공연장도 직접 답사 가고, 포스터도 인쇄 의뢰하러 찾아가고, 공연 전 회식도 잡았다. 사람들이 추억을 조금 간직할 수 있게, 그리고 좀 그럴싸하게 기억에 남도록, 급하게 손목 밴드와 키링도 제작의뢰를 했다. 
     
    키링도 정말 막판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공연 한주 전, 밴드 연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 밴드원들에게 '공연때 시간 끌기 용으로 추첨행사나 하고 싶은데, 경품은 뭘로 하면 좋을지' 물었다. 여러 악기 악세사리들이 아이디어로 던져졌는데, 뭔가 각 악기만의 특성들이 들어있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럼스틱을 따로 제작하자니 가락악기들이 소외되고, 튜너를 만들자니 드럼이 서운해할 것 같았다. 그때 안건에 키링이 나왔다. 그래, 다들 악기 가방은 있으니깐, 하다못해 학교 가방은 다들 있으니깐, 키링은 다들 쓸만하겠다, 싶었다. 디자인팀에서 만들어준 로고를 마우스로 테두리를 따서 새벽 세시에 주문을 넣었다. 
     
    그 와중에 연습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무너지던 팀도 네덜란드의 홍수 막은 소년마냥 내가 빈공간을 메꾸면서 버티고 있었기에, 그리고 내가 끝까지 열심히 이끌고가겠다고 보컬을 설득했기 때문에, 절대 실수는 없어야 했다. 흰수염고래는 내가 가진 66건반 밖의 음을 연주해야 해서 피아노 연습실을 빌려 연습했다. 흰수염고래는 피아노가 이끌고 가는 곡이고, 피아노만 나오는 구간도 많아서, 그리고 복잡해서 나에게 큰 난관이었다. 이겨내야지, 라는 생각하나로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피아노연습실로 30분 걸어가서 점심 먹기 전까지 5시간을 일주일동안 매번 쳤다. 
     
    레테에게 신세지는 것이 많아 그것도 마음의 짐이 많이 되었다. 항상 나에게 잘해주는 친구라서, 그래서 더더욱 신세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있는 동안 레테에게 매 점심밥을 대신 계산해주는 것으로 숙박비를 보답하고, 레테가 공부하고 싶어 했던 주제를 같이 공부하는 것으로 윈윈 상황을 만들어보려 애썼다. 혼자 지내는 걸 훨씬 더 좋아할텐데. 레테야, 내 무리한 부탁에도 너무 잘해줘서 정말 고맙다. 


    공연날은 의외로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다. 기획한대로 이뤄지고, 또 사람들이 이 활동을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계획한 건 별로 없지만 계획대로 별 탈없이 매듭지어져가는 순간이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공연팀 사람들이 너무 즐겁게 참여해줘서 행복했다. 이번은 부활에 의의를 두자는 생각이라서 관객수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웠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학교다닐 때 말 걸어보고 싶었던 사람들, 학교에서 이야기 나눠보지 못했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도 많이 가까워졌다. 이 밴드를 계기로 사람들이 연결되어가는 모습에 넘치도록 뿌듯했다. 내 블로그의 독자들도 많이 유치했다!
     
    순간을 같이 빛내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왜 시상대에 올라가면 하나같이 고마운 사람들 이름만 읇고 내려오는지 알 것 같았다. 상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고마움 한 마디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 22.2% 멤버들 - 진이, 윤서, 소희 선배, 연우, 관영이 - 스물둘 스물셋 멤버들 - 지호, 문수, 산이, 성윤이 - 운영팀 멤버들 - 찬신이, 주은이, 주원 선배 - 그리고 너그러이 봐주신 선배님 팀 선배님들, 공연 보러 와서 사진도 찍어준 레테, 현아, 정웅이, 그리고 자리를 빛내준 저이원선배, 기환이, 윤아와 22기들, 23기 후배들,  모두-들리지 않겠지만- 감사를 전하고 싶다.
     
    특히 우리 밴드멤버들과 운영팀! 서툰 총괄 따라와줘서 너무 고맙다. 덕분에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게 되었다!
     
    그리고 레테! 밥이나 또 먹자!


    민사고를 나와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역시 좁게 보게 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만큼이나 또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적다고, 그 여집합의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기 위해선 열심히 틀 밖으로 발을 뻗어야 한다고 이해했다. 항상 민사인을 예찬하던 나에게 홈런감 스윙으로다가 배를 한대 후려친 말이었다. 
     
    민사인을 향해 팔을 안으로 굽히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가? 열심히 나만의 결론을 내리려 골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버블이 마음의 안식처이다. 밖의 사람들도 경험하되, 안의 사람들도 더 많이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살 좀 빼라 경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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