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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꿰뚫는 수단나의 글, 나의 노래/에세이 2021. 2. 17. 23:23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하나의 본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룬다. 예를 들어, '얼마나 배웠는지 보고 싶다'면 '시험'을 치룬다. '몸에 비타민이 부족하다'면 '보조영양제'를 통해 채운다. '컴퓨터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짜서 컴퓨터에게 알려준다.' 눈이 온 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제설을 한'다. '춥지 않기 위해'서 '옷을 껴입는'다.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글, 말 따위를 쓰거나 한'다. '서로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법'을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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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그 '본질'과 그 '수행방법'이 나눠지게 된다. '...'를 위해 '...'를 사용하여 (통하여) '...'한 결과가 나오게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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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행동양식에 사로잡혀, 때로는 그 수단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얼마나 배웠는지' 알기 위해 치룬 '시험'이 주객전도가 되어,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시험공부'를 한다. 이마저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공정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 시험은 기형적으로 바뀐다. 다른 예로, 전시 지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평시에도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 그 본질은 잊고 그저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반말을 해야 한다'라는 규칙으로 둔갑해 행해지고 있다. 위에서 예시로 든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라는 본질도 사실은 '인격체 간 소통을 위해서'라는 본질을 실현하는 '수단'적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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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든 예시는 '주객 전도'와 '수단이 또 다른 본질로 둔갑'이지만, 이 이외에도 '본질'을 수행하기 위해 '방법으로서 사용하는' 수단들이 그 본질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수단'이 '본질'을 꿰뚫지를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나 스스로도 이 설명을 하기 위해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이 비유를 위해 상황을 끼워맞춰 해석하는 식으로 비유를 찾고 있다. 이만큼 '본질' 자체를 직접 실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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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본질 직접 실현이란, 몸에 비타민이 부족하다면 비타민이 있으면 되고, 춥지 않으려면 춥지 않으면 된다. 얼마나 배웠는지 알고 싶다면 얼마나 배웠는지 알면 된다. 이게 뭔 순환적인 개소리지 싶겠지만, 그 기분이 즉 본질이 본질 자체로서 해결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직접 본질을 다루는 것은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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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런 '본질의 직접 실현'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이해하기 쉬운 - 모습은 바로, '마법'이다. 해리포터 영화를 보면 주문을 외워가며 지팡이를 휘두르기도 하지만, 그냥 아무 말 없이 대상을 휙 가리키면 마법(을 형상화한 빛)이 나가곤 한다. '생각한 대로','맘먹은대로' 일이 이뤄지는 것이다. 물 속에서 숨 쉬고 싶으면 물 속에서 숨쉬면 되고, 공중을 날고 싶으면 말면 되고, 고통을 주고 싶으면 고통을 주면 되고. 어떤가, 위의 순환적인 개소리와 모습이 비슷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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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시들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한 것 같지만, 꼭 '내가 원하는 것'만이 본질인 것은 아니다. 세상의 문제라던가, 사소한 다툼이라던가. 본질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또,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현상이 '본질'일 수도 있고 '수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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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본질1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새로운 본질2가 되었을 때, 본질2에만 완전히 사로잡혀 본질2가 본질1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적인 본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본질1을 채울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공부와 시험의 관계가 딱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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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parent-child 관계(본질이 또다른 본질의 수단인 관계) 를 계속 따라 올라가게 되면 '하나의' 본질이 나올까? 하나의 기원-봉우리-이 아니라면, 여러개의 본질이 서로 수단이 되지 않는 관계에서 최상위의 여러개 -산맥-의 형태가 될까? 수단으로 보이는 본질은 덜 본질적인 것인가? 서로가 서로의 수단인 본질들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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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들에 도달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겠다.
나는 생활을 하면서 '1을 이루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2인데, 2를 이루려고 애쓰다가 결국 1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원초적, 기원적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평안히 살기 위해 생겨난 것이 종교인 듯한데, 그 종교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리고.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보기 위해 생겨난 것이 시험인데, 시험이 목적이 되어 이를 위한 맞춤식 공부를 하고 앉아있고.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인데, 돈을 버는 행위가 인생을 전부 채우고 앉아있고. 계속 '아 이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해결방안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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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가 이런 '도구적 접근','수단적 접근' 위에서 모든 행동을 취해서 그런 것 같다. ..를 '위해' ..를 해야 한다. 와 같은 것. ..를 하고 싶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와 같은 것. 마치 '인과관계'가 우리의 뇌에 내재되어 있는듯하게 '문제 해결의 수단적 접근'도 우리의 뇌에 내재되어 있는 motherboard software 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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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관적'이라는 단어를 정말 좋아한다. 딱 봤을 때 '그렇구나' 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행동이든, 해결책이든, 설명이든 '직관적'인 것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논리이다.
위의 '아 이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해결방안이다' 라는 것도, 직관적이지 않은 해결방안들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인 것이다. 본질을 꿰뚫는 해결방안은 직관적이다. 이런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수단들을 볼 때면 마치 골드버그 장치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벽의 스위치를 켜기 위해 이거 굴리고 저거 떨구고 등등의 과정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동을 하다보니 본질이 해결되는, 이런 찜찜한 마무리. 너무 '도구'적 접근이랄까.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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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야말로 '비-직관적이다.'배경 : Photo by Rolf Schmidbau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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