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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의 범위, 그 의미에 대하여
    나의 글, 나의 노래/감자 글 2023. 6. 13. 16:23

    가족은 나에게 주어진 가족과 내가 고르는 가족이 있다. 하나의 인간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관점의 차이로 다르게 다가온다. 예컨대, 나에게 엄마와 아빠는 주어진 가족이고, 배우자는 고르는 가족이다. 다시, 내 자녀들은 주어진 가족이다. 우리는 그 두 가족 관점에 있어 다른 가치를 기대하고, 다른 책임을 강요한다. 


    먼저 나에게 주어진 가족에 대해 알아보자.

     

    주어진 가족은 혈연으로 엮인 관계들이다. 생명의 잉태와 동시에 생기는 관계이다. 

     

    누구나 부모가 존재해야 하므로, 나에게 주어진 가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들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책임 관계를 '으레' 가진다. 생물학적 생장과 생존을 위한 도움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규율과 기본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도 제공해야하고, 제공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들을 나에게 주어줄 책임은 과연 나에게 주어진 가족에게 있는가?

     

    누군가는 사회가 공동으로 어린 인간을 보육해야 한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결국 혈육의 생모, 생부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것의 동의된 전제는 '아이는 사회라는 개념적 집단 특성상 생물학적 생장에 있어 돌봄이 필수적이며, 사회적 규율과 기본 능력 또한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본능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라는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사는 이상, 그리고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이 사회 속에 속하게 강제하는 이상, 한 신생아가 태어나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까지 우리가 구축한 사회라는 틀에 맞춰 살 수 있도록 돕고 가르쳐야 하는 필요가 있다. 이 필요는 누가 fullfill 것인가? 그 누구에게 의무가 있는가? 책임이 있는가? 

     

    누구나 부모가 존재하므로, 그 생모/생부가 이 의무와 책임을 가져가는 것은 힐베르트의 호텔처럼 일대일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우수한 전략이다. 단지 일대일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당위를 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누군가는 그 부모를 잃기도 하고, 부모 간에서도 정확히 어떤 가치를 누가 챙겨줘야 하는지는 정해주지 않는다. 

     

    루소는 자신의 교육철학이 담긴 <에밀> 에서 교육의 목적은 도덕적 자유, 즉 자유와 규율, 의지의 독립성과 사회정의를 양립시킬 수 있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한다. (출처: 위키백과..) 몇마디 인용해서 사용하고 싶으나, 루소 수업을 반쯤 까먹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줄인다.. 


    내가 고르는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자. 

     

    고르는 가족은 나에게 선택의 자율이 어느정도 있는 만큼, 내가 그 의미와 바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뭐, 선택이 곧 성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어떤 기준으로 가족을 고르고 싶을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선 먼저 나에게 가족이란 어떤 사람인가, 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가족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다. 생활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생계를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생계와 생활의 동반자를 넘어,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에게 마음을 놓는가? 첫째로,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다. 다시 말해, 내가 존경할법한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 나와 당신의 슬픔을 진중하게 대하는 사람. 행동거지를 신중히 고르는 사람.

     

    어쩌다보니 내 이상형을 소개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 부끄럽다. 일단 내 마음에 들어야만 같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으니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어찌보면 합리적인듯 하다. 여기서, 내 두번째 판단기준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둘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떠나, 둘이 같이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둘째는, 사람은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상대방의 행동을 마음 깊이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내 앞의 사람을 내 입맛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서로를 고른 우리는 물감이 아닌 모니터처럼 섞일 줄 알아야 한다. 물감은 빨강과 파랑이 비가역적으로 융화해 노란색이 되는 반면, 모니터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잘한 픽셀단위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색채를 지키고 상대방의 색채를 듣고 지켜준다면, 우리는 마치 섞인듯 노란빛을 내며 서로 힘이되어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엄마는 이를 평행선이라고 종종 표현하신다. 부부는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만 하면 된다. 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지 않고, 평행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내밀한 사이끼리, 조금의 방향 조정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닌가'라고 가끔 의견을 제시하지만, 나는 아직 엄마의 의견에 동의한다. 부부사이는 조언을 할 뿐 방향을 틀어주지 않아야 한다. 서로의 조언을 깊게 듣고, 결국은 자신이 조타를 잡고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 방향 결정권까지도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조언을 납득하기 쉽게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참견'이다. 한번 참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기도 하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주어진 가족도 따지고 보면 내가 고른 가족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고아원에 버릴 수도 있었고,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머니를 부양하지 않는 불효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교육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도리를 느껴 부모를 부양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다. 한 배에 탄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이뤄졌지만, 배에서 내리지 않는 것은 분명 자율에서 나온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 두 가족의 관점이 혼재한 이 사회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를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역할' 이라 생각하는 점이다. 부모가 자식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사회 구성원 대표로서의 역할'이지, 내가 너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식과 부모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대함과 동시에, 내가 붙잡기로 고른 동반자임을 알고,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반대도 중요하다. 배우자는 나에게 '삶의 동반자'일 뿐, '사회 구성원 대표로서' 가르침을 줘야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르치려고 들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두 관계가 중첩된 혈연관계는 현명하게 행동하기 정말 어려운 관계이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아이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것. 물풍선을 터뜨리지 않고 아슬아슬 옮기는 것 같다. 자식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짧은 생각이 닿지 않더라도 수용하는 것. 전우를 믿고 전쟁터로 뛰어드는 용사와 같다.  

     

    또, 부부사이끼리 간접적 혈연관계를 만들게 되는 '아이 갖기' 도 정말 어려운 문제이자 결심인 것 같다. 어린 마음에 '나는 남자라서 출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니깐 이기적이지 말아야겠다'고만 생각했었다. 아이를 통해 둘 사이의 새로운 결심 고리를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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